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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솔 Sep 14. 2022

반려식물

산골 일기 삼십네 번째

”간밤에 바람소리가 세더니 아이고~ 허리가 휘었구나. “

”벌써 꽃망울이 맺혔네. 힘들지는 않았니? “

”어제 물을 적게 주어 목말랐지? “     


아내는 뜨락의 나무에 물을 주거나 전지를 하거나 흙을 북돋아 줄 때마다 마치 말귀를 알아듣는 동물들에게 

하듯 나무와 풀꽃에게 말을 건넨다. 그 말속에는 그들을 향한 애잔한 마음, 사랑의 마음이 담겨있다. 나에게 그런 부드러운 음성을 매일 들려주면 좋으련만. 하하. 아내에게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가 친구다.     


최근 들어 부쩍 ‘반려식물’ 아라는 말이 유행처럼 자주 들려온다. 사람들의 관심이 반려동물에서 반려식물로 조금씩 옮겨 오고 있다는 느낌이다. 우리 집도 고양이 한 마리를 키우고 있지만 반려동물이라는 것이 가져다주는 기쁨과 행복에 못지않게 정성을 요하는 것도 사실이다. 집에 고양이가 생기고부터 가족 모두가 함께 

떠나는 여행은 거의 불가능해졌다. 누군가는 남아서 먹이거나 배설물을 치우거나 건강을 돌보아야 했다. 

어디 그뿐인가? 고양이를 키우면서 우리는 오래도록 사용하던 가죽소파를 버려야 했다. 발톱 갈이를 하는 

고양이 습성 앞에 가죽이나 천으로 된 가구들은 남아나지 못했다. 거실 이곳 저것, 옷장 이 구석, 저 구석 고양이 털로 범벅이 되는 것은 감내해야 할 몫의 또 다른 부담이었다. 반려견을 키우는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고양이는 자기만의 세계가 있어 일상을 방해하지 않는데 개들은 그 특유의 친화력으로 함께 놀아줘야 하는 의무를 만들어 내곤 한다. 즉 반려동물을 통해 얻는 기쁨과 행복만큼 노력하고 희생해야 하는 반대급부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반대급부를 기쁨으로 감당하는 애호가들을 보면 반려동물이 단순한 동물이 아니라 가족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들에게 행복의 반대급부 운운하는 나의 표현조차 불경스러운 표현일 수 있으리라!     

하지만 식물의 세계를 알아가면서 반려식물의 매력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특별히 모종을 사다가 직접 꾸미고 심은 초목의 경우는 그 느낌이 사뭇 다르다. 아무 말 없이 항상 그 자리에 있는 것 같지만 조금씩 변모하여 잎새의 색깔이 바뀌기도 하고 꽃을 피워내기도 하고 가지를 뻗어 풍성하게 자신을 치장하는 모습을 보면 경이롭다. 정지해 있는 듯 결코 멈춰서 있지 않은 그 역동성이 사랑스럽다. 며칠 자리를 비워도 묵묵히 그 자리에 살아 있어 묵언의 인사를 건네는 식물은 정말 좋은 친구다. 오래 잊혀두어도 다시 만나는 순간 세월의 간극이 사라지는 그런 좋은 친구 같은 존재가 반려식물이다. 상대방의 반응을 살펴야 하는 부담 없이 그저 내 마음을 토로할 수 있는 친구, 묵묵히 내 얘기를 들어주며 여린 잎새와 가지를 들어 나를 어루만지고 그 향기로 

내 마음을 부드럽게 하는 친구.        


시골에 들어와 식물들을 키우며 무엇이든 사랑의 눈으로 보면 그의 마음과 생각을 알 수 있다는 것을 새삼 다시 깨닫는다. 아는 지인 중에는 외출했다가 돌아와 키우는 초목을 바라보면 지금 그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금방 알 수 있다고 했다.     


”아~ 지금 물 한 모금이 필요하구나. “

”따스한 햇살 드는 곳에 있고 싶다고? “

”바람 부는 곳에서 잎새를 한번 펄럭이고 싶구나? “

”지금 좀 덥구나? “     


그녀에게는 식물이 호소하는 목소리가 들린단다. 그녀를 보면서 반려식물을 삼으려면 저 정도의 민감한 정서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식물은 사랑을 갈구하지도 자신의 요구 사항에 대해서도 민감하지 않다. 그저 온몸으로 자신을 표현할 뿐이다. 그 사랑의 몸짓을 알아주어야 하는 것은 오로지 우리의 몫이다. 그리고 그 몸짓이 내게 인식될 때 식물은 드디어 그 식물은 반려 생물이 되는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나는 분재를 좋아하지 않는다. 자신이 보암직한 모양에 따라 철사 줄로 가지를 마구 휘어 감아 옴짝 치 못하게 하는 것이 식물을 결박한 것 같아 보기 싫다. 나는 철사 줄에 묶여 있는 여린 꽃나무를 보면 

마치 사악한 권력에 의해 두 손 꽁꽁 묶여 끌려가는 가녀린 누이의 모습이 연상되곤 한다. 그래서 노지에 무질서한 듯 흐드러지게 핀 들꽃이 좋은 것이다. 비록 화분에 심겨 있어도 제 가지를 마음껏 늘어뜨려 자유스럽게 뻗은 가지며 잎새들이 좋은 것이다. 간혹 멋진 분재를 보면 와~ 하는 감탄사가 들다가도 마치 성형한 미인을 보는 듯  오래도록 마음에 남지 않는다. 소박하지 않은 정형화된 아름다움이 싫다. 그래서 나는 꾸밈없이 소박한 야생화가 좋다. 볕 드는 창가에 놓인 작은 꽃송이가 정겹다. 눈길 닿지 않은 뜨락의 한 구석에 함초롬히 핀 작은 꽃송이가 사랑스럽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자애로운 눈빛으로 가만히 들어주는 사람으로 있고 싶다. 자기 생각을 말하기에 급급해서 입이 근질거리는 사람이 아니라 가만히 그의 생각을 끝까지 들어주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그저 가만히 머물러 훈훈한 온기를 내어주는 햇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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