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일기 오십일곱번째
가까운 단계시장터에 작은 목욕탕이 생겼다.
목욕비가 도시의 절반이고 경로우대 목욕비도 지원되니 종일 자리차지가 어려울 만큼 붐빈다.
정부의 복지정책이 피부에 와닿기 어려운데 시골의 작은 목욕탕은 혜택이 실감 난다.
따뜻한 물이 여의치 않은 시골에서 언제나 뜨신 물이 콸콸 쏟아지니 아예 달 목욕을 끊어 하루를 시작하는 어르신들이 많다. 오후에는 농사일을 마친 농부들이 순차별로 노동의 고단한 땀을 씻어내다 보니 목욕탕은 매 시간마다 등장인물이 바뀌는 사랑방 같다.
그래서인지 목욕탕에 갈 때마다 시간대별로 마주치는 얼굴들이 늘 한결같다.
매번 같은 사람들을 마주치며 이야기를 흘려듣게 되니 이제는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떤 것을 고민하는지 훤히 알게 된다.
그런데 시골 목욕탕에는 아무런 이야기를 주고받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그 사람의 일상을 알게 하는
아주 뚜렷한 단서 하나가 숨겨져 있다.
도시에서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사람들의 일상이 그들의 벗은 몸에 뚜렷한 단서로 새겨져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햇살이 그려놓은 그림.
사람들의 몸에는 햇살이 새기고 지난 자국들이 마치 계급장처럼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그 햇살에 그을린 자국을 보면 그가 오늘, 아니 여름 내내 어떻게 그의 삶을 지탱했는지 그 비밀한 삶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시골엔 대부분의 일터가 비닐하우스 거나 들녘이나 산자락이다 보니 어떤 형태로든 햇살의 흔적이 몸에 남겨진다.
러닝셔츠 자국만 양어깨에 선명한 저 반백의 농군은 아마도 어느 비닐하우스에서 고된 삶의 시간을 떨구고 왔음에 틀림없고, 러닝셔츠 자국조차 없이 상체만 진하게 그은 저 청년은 옷자락 하나도 거추장스러울 만큼 더운 노지에서 하루를 버텨냈을 것이다. 그런데 간혹 온몸이 갈색으로 익은 채, 짧은 반바지 자국만 허옇게 드러난 사람들이 보인다. 그는 분명 인적이 드문 밭자락이나 산자락에서 겨우 반바지 하나만 걸치고서 햇살의 따가움을 견뎌냈으리라.
나는 그렇게 햇살에 그은 사람들의 몸뚱어리를 바라보며 그들의 노동과 계급을 짐작할 수 있었다.
세상의 일반적인 통념으로 보면 햇살이 점령한 면적이 크면 클수록 그는 소위 사회적 계급이 낮을 가능성이 높았다. 언제부터인지 노동의 작업량이 많을수록 낮은 일자리가 되는 서글픈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노동의 신성함이란 것이 얼마나 진부한 이야기가 되고 말았는지!
나 또한 예외가 아니어서 은연중에 그런 그릇된 통념에 사로잡히는 것이 자연스러울 때가 많았다.
생각할수록 부끄럽고 또 부끄럽지만...
하지만 어느 날인가 와이셔츠 깃 아래 좁은 목젖에만 햇살이 살짝 스쳐간 듯
두툼한 몸매의 중년 사내의 희멀건 몸뚱어리를 보고 나서 내 생각이 환기되었다.
노동의 흔적이라곤 조금도 찾을 수 없는 그를 보면서 나도 모르게 노동의 신성함을 무시했던
나의 통념이 한심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물론 사무실에 앉아 하루 종일 컴퓨터와 씨름하는 그 삭막한 사무노동을 비하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햇살에 젖은 삶보다는 한결 수월했을지도 모를 희멀건 한 그들의 삶을 은연중 부러워하는
나의 지극히 얄팍한 정서가 부끄러웠던 것이다.
그렇다. 햇살 자국으로 가득한 몸이야말로 어쩌면 지난한 삶의 노고를 견뎌낸 가장 아름답고 정직한 흔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검게 그은 그들의 몸과 군데군데 굳은살로 박인 상처와 옹이의 흔적은 삶을 치열하게 살아낸 전사의 흔적이다. 척박한 삶의 전선에서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고단한 자리를 꿋꿋이 견뎌낸 시간의 근육이다.
결코 만만치 않은 일상의 무게를 묵묵히 이겨낸 햇살자국이 인생에 수여되는 최고의 훈장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햇살자국은 결코 낮은 일상의 상징이 아니었다.
편한 자리만을 탐하며 끊임없이 높은 위치를 동경하는 후안무치 불한당들이 얼마나 많은 세상인가!
그리고 보면 굴곡을 피해 달아난 인생보다 지질한 인생도 없을 터이다.
깊이를 담은 서사(書史) 몇 줄마저 남기지 못했을 테니 말이다.
창가로 따사로운 햇살이 비쳐드는 시골 목욕탕에 앉아 이런저런 생각이 깊어진다.
하지만 사람들의 몸에 달린 햇살의 훈장을 언제까지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농사를 버리고 도시로 떠나는 인구가 손에 잡힐 듯 많은 탓도 있지만 시골정서도 예전 같지 않기 때문이다.
이곳도 예외가 아니어서 삼엄한 갱단의 농장이라도 되는 양, 복면으로 얼굴과 몸을 꽁꽁 싸매고 일하는 일터가 다반사다. 비 오듯 하는 땀을 견딜지언정 햇살 한 점도 용납할 수 없다는 농군들의 굳은 의지를 보고 있으면 햇살의 훈장이 식별 가능한 날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학창 시절부터 얼굴 검다는 이유로 별명이 쿤타킨테(알렉스 헤일리의 ‘뿌리’라는 소설에 등장하는 흑인 노예)였던 나는 그을린 얼굴이 자연스러운 이곳이 좋다.
햇살의 노고가 자연스러운 이곳에서 내 얼굴은 지극히 평범한 얼굴이 되었다.
날이 갈수록 팔과 목덜미까지 새로운 햇살이 훈장처럼 늘어간다.
하지만 괜찮다.
그래서 오히려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