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토대학교에서 비즈니스 수업을 들었다. 장학금을 4학년이 되기 전에 모두 사용해야 했고 토론토에서 공부하고 있던 친구와 여행을 약속하며 특별한 고민 없이 토론토행을 결정했다. 그렇게 종강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비행기를 탔다. 아무 계획이 없었다. 어디를 갈지, 누구를 만날지, 무엇을 볼지를 전혀 가늠할 수 없었다.
내가 들었던 비즈니스 수업은 해외 취업을 위해 알아두어야 하는 것들을 전반적으로 배우는 수업이었다. 비즈니스 용어, 문화권에 따른 비즈니스 매너, 프레젠테이션 스킬, 자기소개서와 이력서, 잡 인터뷰 준비, 협상하는 방법 등을 배웠고 파이널로 팀별로 미래의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었다. 매일 반 친구들과 하고 싶은 일, 가치관, 비즈니스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순식간에 서로의 많은 부분을 알게 되었다. 수업이 끝나고 점심을 먹고 커피를 마시며 나누었던 이야기들이 차곡히 쌓여 우리는 지금도 서로의 삶에 잔잔한 영향을 주고 있다.
나는 지금까지 '혼자'보다는 '함께'일 때가 늘 더 즐겁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토론토에 있으면서 나는 혼자 있는 시간을 함께 보내는 시간과 다르게 즐기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매력적인 공간, 사물, 사람을 보게 되면 그걸 주위에 있는 사람에게 전하지 못하니 나는 노트를 펴서 글을 썼다. 그리고 함께였다면 보지 못했을 것 같은 작고 사소한 것들에 시선을 두는 나를 발견했다.
주말마다 여행을 갔는데 첫 여행지는 몬트리올이었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엄청난 칼바람이 몰아쳤다. 너무 놀라 검색해보니 영하 24도라는 엄청난 추위가 10년 만에 찾아왔다고 한다. 재빨리 숙소로 향했지만 순식간에 발에 감각이 없어졌고 온 몸의 털이 바짝 섰다. 그렇게 겨우 에어비앤비에 도착했는데 문은 열려있었고 누군가가 몇 분 전에 짐을 싸서 나간 것처럼 어질러져있었다. 호스트가 청소를 하는 동안 나는 친구와 숙소 옆에 있는 작은 카페에 갔다. 따뜻한 라떼를 홀짝 마시며 몸을 녹였다. 그리고 얼어붙은 서로의 얼굴을 보고 피식 웃었다. 아무 계획이 없기에 가능한 웃음이었다.
계획은 없었지만 그 도시 사람들의 발걸음에 섞여 걸어가다 자연스럽게 도착한 곳에서의 시간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그 거리와 공간의 느낌, 우리가 느꼈던 생생함은 어떤 화질의 사진으로도 담아낼 수 없었다. 내 눈에 담는 것이 이 느낌을 오래 간직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렇게 나는 내 인생에서 가장 게으른 여행을 했다. 우리는 하루의 대부분을 실내에서 마시고 먹고 이야기하며 보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게으를수록 행복해졌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수록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누게 됐고 사소한 것들에 눈이 갔다. 모든 게 삐그덕 거리던 몬트리올 여행이 이렇게 그리운 건 그래서가 아닐까 싶다.
또 다른 주말에는 뉴욕에 갔다. 보고 싶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머릿속에 떠다니는 수많은 단어 중에 가장 깨끗하고 맑은 것을 선택하게 만드는 사람, 함께한 시간이 오래지 않아도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많은 말을 할 필요가 없는 그런 사람들이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1월의 어느 날, 나는 다시 한번 이 따뜻한 가족과 영화 같은 시간을 보냈다.
뉴욕에서는 미술관에 자주 갔다. 그리고 매일 밤, 침대에서 친구와 찍어둔 사진들을 보며 내 앨범에는 작품 사진보다 그걸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의 사진이 더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 아빠의 무릎에 앉아 그림을 그리던 꼬마 아이, 관람하는 할아버지의 눈빛, 그리고 그들이 나누는 대화들에 더 눈이 갔다. 다들 무엇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나에게 미술관은 이런 색다른 재미가 있다.
뉴욕의 야경은 눈에 다 담기 어려울 만큼 찬란한 빛을 내뿜는데,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이 빛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면 많은 생각이 든다. 짧았지만 가슴 벅찼고, 일상적이었지만 무엇보다 특별했던 대학에서의 3년을 돌이켜봤다. 그리고 문득 <저스트 키즈>의 한 구절이 떠올라 메모장을 열었다.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걸까? 우린 뭐가 될까? 철없는 우리가 자신을 향해 항상 던지던 질문들이었다. 그리고 철없는 대답 또한 알게 되었다. 우리는 서로에게로 가고 있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되었다.
이 밤을 녹음하고 싶었다. 무대인사를 시작하자 하나 둘 일어나 외치던 브라보, 곳곳에서 쏟아지던 함성과 박수갈채, 노래를 흥얼거리며 공연장을 빠져나가는 사람들... 그리고 가슴 벅참을 한참 쏟아내고도 잠들기 직전까지 그 노래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던 우리까지. 정말 아름다운 밤이었다.
휘트니 뮤지엄 꼭대기에 있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뉴욕 여행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옆 테이블에 있던 남자가 우리에게 바나나초코케익 한 조각을 건넸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대화가 시작되었다. 음악을 만들고 필름 제작을 업으로 하는 사람이었고 등에 태극기가 붙은 옷을 입고 다닐 정도로 한국을 좋아했다. 음악, 크리에이티브, 뉴욕, 한국... 이것만으로도 할 얘기가 많았고 그때의 소소하고 가벼운 대화가 참 즐거웠다. 우리는 언젠가 다시 만나자며 헤어졌다. 허망한 약속임을 알지만 그 순간 나누었던 우리의 대화만큼은 결코 헛되지 않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토론토에서 마음에 쏙 드는 카페를 찾고 싶어 1달 동안 다양한 카페를 갔었다. 그런데 한국으로 돌아오기 며칠 전, 집에서 걸어서 1분 거리에 있는 카페를 알게 되었다. 창이 크고 햇빛이 구석까지 들어왔다. 작은 동네 카페여서 조용했고 기분 좋은 재즈가 흘러나오는 곳이었다. 주문한 라떼는 너무 맛있었고 레몬 코코넛 타르트는 완벽했다. 나는 어이없게도 돌고 돌아 집 앞에서 내가 원하던 카페를 찾은 것이다. 아쉽게도 그 날이 그 카페에 갈 수 있던 마지막 날이었지만 눈이 예쁘게 내리던 그 날 오후를 그곳에서 보낸 것이 참 다행이다.
하루는 수업을 마치고 리틀 이태리 쪽에 있는 모노클 샵에 갔다. 차분하지만 열정이 넘치던 이 공간에서 나누었던 직원과의 대화는 지금 생각해도 가슴 벅차다. 자신의 일과 모노클에 관해 이야기하며 눈이 반짝반짝 빛나던 그분은 매장에 있는 물건과 잡지에 대해 하나씩 차근차근 설명해나갔다. 덕분에 그 조그마한 공간을 1시간 동안 구경했다. 나의 질문 공세에 내어 주시던 물 한잔이 참 감사했고 어렵더라도 미래의 나도 좋아하는 일을 하며 반짝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아이보리 컬러의 포켓이 달린 남색 노트 한 권을 샀다. 사악한 가격이었다. 친구와 교통비를 아끼자며 하루에 2시간씩 걸어 다녔지만 그 노트는 살 수밖에 없었다. 그 공간에서 보낸 시간은 어떤 값이든 치를 만큼 이미 큰 영감을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분은 바스락거리는 체크무늬 포장지를 꺼내 노트를 돌돌 말더니 금색 스티커를 붙였다. 그러고는 흰 리본을 정성스럽게 묶어 나에게 건넸다. 또 오겠다는 약속을 하며 노트를 품에 안고 샵을 빠져나왔다. 다시 1시간을 걸어 이탈리안 레스토랑에 저녁을 먹으러 갔다. 구름 위를 둥둥 떠다니는 기분이었고 그날 저녁으로 먹은 파스타는 손에 꼽을 정도로 맛있었다.
조용하지만 활기가 넘치는 공간을 좋아한다. 젊은 부부가 운영하던 Mjolk(스웨덴어로 우유)라는 편집샵도 그랬다. 북유럽의 데니쉬 무드와 일본의 감성을 연결한 라이프스타일 브랜드의 쇼룸이고 나는 여기서 진행했던 공간 리뉴얼 프로젝트가 흥미로워서 방문하게 되었다. 어디 앉을 수 있는 소파도 없지만 몇 시간은 서서 구경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한쪽 구석에서 책을 쓰고 삽입될 사진을 촬영하는 부부를 한참 바라보다 이들이 최근에 쓴 책을 사서 나왔다.
Power plant art gallery에 갔다가 토론토에서 마지막 저녁 식사를 하는 날이었다. 일주일 전부터 친구와 토론토에서의 마지막 식사를 근사한 곳에서 하기로 했다. 나는 Odami라는 디자인 스튜디오를 통해 알게 되었던 Sara라는 레스토랑을 예약했다.
곡선과 직선의 조화가 아름다운 공간이었다. 우리는 와규 토스트와 립을 주문했고 식탁 가운데에 뚫린 구멍에 폰을 쏙 넣었다. 매일 학교 앞에서 시간에 쫓겨 밥을 먹던 우리가 무려 2시간 동안 식사를 했다. 친구와 처음으로 매우 천천히, 음식을 한입 한입 음미했다. 칼질보다 이야기 속도가 빠른 시간이었고 처음으로 책상 위에 핸드폰 없이 서로의 눈을 바라보고 대화를 나누었다. 토론토에서 있었던 일들, 조금씩 많은 것들이 변해 온 대학생활, 앞으로의 우리에 대해 이야기했고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을 전하며 아름다웠던 시간을 잘 마무리했다. 계산을 하고 식당을 빠져나오니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 정도의 양으로 배가 차지 않았던 우리는 눈 속을 헤집고 밀크티를 사러 차타임으로 뛰어가며 깔깔 웃었다. 그 순간을 절대 잊지 못할 것 같다. '청춘'이라는 단어를 식상해서 좋아하지 않지만 그 단어가 가장 잘 어울리는 하루였다.
토론토에서의 시간은 내 예상보다 훨씬 더 진한 발자국을 남겼다. 새로운 사람을 많이 만났고 좋아하는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 사람들과 마주 보고 나누었던 대화, 함께 한 식사와 술자리, 불꽃 튀던 토론... 함께한 그 시간들을 잊고 싶지 않아 시간이 조금 지나 이 글을 쓴다. 그리고 나는 이 시간들을 통해 천천히 흘러야 가능한 생각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여유로운 시간들 속에서 나는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좋은 것을 보면 생각나는 사람은 누구인지, 말하기 힘들었던 꿈은 무엇인지, 어이없는 상상은 하루에 몇 번이나 하는지, 날씨가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내 속에서 자꾸 들려오는 작은 목소리는 무엇인지... 날은 춥지만 마음만은 포근했던 토론토 생활이 그렇게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