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바람에도 뜨거웠던 우리
어릴 적 기억 속 우리 집은 산꼭대기에 있던 마을이다.
안산 초등학교를 지나치면 나오는 계단이 눈으로 셀 수 없을 만큼 굽이굽이 이어져 있었는데, 이 계단을 오십 개쯤 올라가면 그제야 마을이 시작되었다.
그 마을은 다시 둘로 갈라져서 오른쪽으로 가면 경사가 완만한 대신 한참 걸어가야 했고, 왼쪽으로 가면 집이 많지 않은 대신 조금 더 가팔라서 숨을 헐떡거려야 했다.
이쪽이든 저쪽이든 우리 집까지 가려면 계단을 50개쯤은 더 올라가야 했고, 눈이 오는 날에 학교에 가려면 미끄럼틀을 타듯 찌익 찍 미끄러지면서 내려와야 했다.
그렇게 산꼭대기에 살아야 할 만큼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었어도 부모님은 책을 무척 사랑하셨다.
방학이나 크리스마스 때면 다른 선물보다도 주로 책을 사주셨는데 한두 권이 아니라 전집을 사주실 때가 많았다.
어느 해엔 ‘세계 명작 동화 전집’을 사주시고 또 어느 해엔 ‘세계 위인 전집’을 사 주셨다.
이 전집 선물은 6학년 겨울방학 때에 사 주셨던 ‘세계 명작 소설 전집’에서 끝이 났다.
아마도 2년 차이인 오빠가 중학교 3학년이 되어서 공부에 집중해야 하는 시기가 왔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어릴 때 만났던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 몽테크리스토 백작, 제인 에어, 폭풍의 언덕 등은 지금까지도 내 가슴에 살아 있다.
우리는 삼 남매인데, 다섯 살 아래인 동생은 내가 돌봐줘야 하는 존재였고 두 살 위인 오빠는 친구같이 더 가까운 사이였다.
오빠와는 놀기도 잘 놀고 싸우기도 잘 싸웠다.
어릴 땐 음악이나 책의 영향을 오빠에게서 가장 많이 받기도 했다.
특히 부모님이 전집을 사주시면 오빠와 나는 '누가 더 빨리 읽나' 내기를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첫째를 이겨보려는 둘째의 성향이 고스란히 나왔던 것 같아 우습지만, 그 당시엔 심각했다.
나보다 나이가 많아서 읽는 속도가 훨씬 빨랐을 오빠를 이겨보겠다고 덤볐던 게 가상할 따름이다.
산꼭대기의 그 집은 한겨울에 바람 소리가 엄청나게 컸다.
가운데가 움푹 파진 마당에 나가면 세상의 바람이 다 몰려 들어올 것처럼 휭휭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는 내기에 몰입했다.
시이작!!
서로 그렇게 외치면 그 시간부터는 전쟁이다.
밥 먹는 시간도 아까워서 밥을 먹으면서도 책을 놓지 않았다.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엄마에게 혼나면 그제야 손에서 책을 놓고 밥을 먹었다.
거의 마시다시피 후루룩 먹고는 우리는 다시 책을 펼쳐서 읽었다.
밤엔 상대방보다 늦게 자려고 하고, 더 읽어야 하는데 졸리면 감기는 눈을 속이며 읽는 척하기도 했다.
잠자는 시간과 밥 먹는 시간을 최소화해서 압축하면 하루에 열몇 시간을 읽을 수 있었다.
우리는 비록 어렸지만 하루에 몇 권씩이나 읽은 책을 쌓아 올릴 수 있었다.
책이 쌓일 때마다 신나고 나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그리고 사흘이나 나흘이면 이 내기의 막이 내렸다.
아마 대부분 오빠가 이겼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조금 분한 마음에 씩씩거리면서 다음 방학을 기다렸던 것 같다.
초등학생들이 이런 경험을 언제 또 할 수 있으랴.
어렸을 때 읽었던 저 전집들이 다 기억나는 건 아마도 오빠와 내기하느라 더 집중해서 읽은 덕분이 아닐까 싶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절, 영원히 잊지 않고 싶은 추억.
이런 경험들이 초등학교 6학년 때쯤엔 책방을 좋아하는 것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 당시에 나는 홈즈와 루팡에 완전히 빠져 있었는데, 매번 새 책을 사기엔 돈이 모자라니 헌책방을 찾아다니게 된 것이다.
내 단골 헌책방에서는 세 권을 팔면 한 권을 다시 살 수 있었다.
나는 홈즈 단행본을 세 권 읽고 한 권을 바꿔 오는 것을 반복해서 전체 시리즈를 다 읽을 수 있었다.
종이와 종이가 뭉쳐지고 눌러져서 나는 세월의 냄새, 책과 책 사이에서 몰래 숨 쉬는 햇살, 빼곡하게 꽂혀 있는 책들 중에서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아낼 때의 희열.
이런 것들이 켜켜이 쌓여서 책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자라게 해 주었다.
그리고 장래 희망이 작가, 책방 주인, 사서일 만큼 책은 나와 떨어질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지금도 책이 곁에 있으면 마음이 안정되고 책 냄새가 나면 놀잇감을 찾은 것 같은 설렘을 느끼게 된다.
이것은 순전히 어릴 때 오랫동안 책과 함께 걸은 시간들 덕분이다.
내 가슴엔 책을 좋아할 수밖에 없는 추억이 잔뜩 남아 있고, 그 추억은 마르지 않는 샘처럼 책에 대한 열망을 계속 채워 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마음이 건강하게 계속 자란 것만은 아니었다.
(다음 주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