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함을 즐겨야 할 때도 있다.

어느 날 수박씨를 보았다.

by LALA쌤


"달라붙지 마! 걸리적거려."


더운 여름날 거리를 걷다 보면 들려오는 성난 목소리들이 있다. 찐득하게 달라붙는 아이들과 멀어지고 싶은 엄마의 모습에서 들리기도 하고, 땀이 잔뜩 난 손으로 눈치 없이 여자 친구 손을 붙잡는 남자친구가 혼날 때 들리는 목소리이기도 하다. 나도 마찬가지로 걸리적거리는 것은 딱 질색이다. 여름날 내 목에 진득이 달라붙어 존재감을 과시하는 머리카락도 싫고, 지하철에서 어쩌다 닿는 낯선 이의 털 난 팔도 싫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나를 언짢게 만드는 것들은 여름의 과일들이다. 불쾌지수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을 때는 달달한 것이라도 먹어야 되는데, 여름에 나오는 달달구리들은 계절을 닮아서인지 만만치 않다. 맛있는 과일들은 죄다 먹기 불편하다! 망고는 한가운데에 커다랗고 납작한 씨가 버티고 있다. 파내면 은근히 먹을 게 없어서 당황스럽다. 과즙이 팡 터지는 리치도 가운데에 지구 핵을 연상케 하는 둥근 씨앗이 들어 있다. 어째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 포도는 악질 중에서도 악질이다. 그 조그만 열매 위에 껍질은 얼마나 두껍고 그 안에 든 씨앗은 얼마나 쓰고 커다란지. 가끔은 포도를 먹는 건지, 씨앗 뱉기 훈련을 하는 건지 헷갈린다.

f0a4f2bcce79420f9b3c03d957a91103.jpg 이 정도만 박혀 있으면 좋지 않을까?

망고, 리치, 포도 등 이 노답 삼 형제도 가뿐히 이기는 걸리적 과일 최강자가 있으니, 바로 수박이다. 이 녀석은 자르는 곳마다 씨앗이 켜켜이 박혀 있다. 이쯤 젓가락으로 파냈으면 없겠지 하고 베어 물면 보이지 않는 곳에 또 몇 놈이 박혀 있다. 지금 나랑 숨바꼭질하는 건가. 그렇다고 다 갈아 마시자니 언제 또 씨를 빼나 싶다. 참을성 있게 혀로 한 알 한 알 골라먹다가 씨앗을 퉤, 뱉을 때면 사람 꼴이 아주 우스워진다. 부끄러움이 많은 나는 남들 앞에서 씨앗을 퉤퉤 뱉는 게 왠지 싫어서 조용히 휴지를 가져다가 한 번에 뱉거나 그냥 우적우적 씹어 먹어버린다. 원래 맛있는 음식은 먹기가 불편하다고 했던가, 어릴 적 엄마가 하셨던 말씀이 떠오른다.


내 혀의 안위와 목구멍의 평화를 위해서라면 수박이고 리치고 망고고 모든 과일들은 먹기 좋게 씨앗이 없어야 한다. 있어도 딸기처럼 거슬리지 않는 수준으로 있어야 한다. 그러나 다들 알다시피 씨앗은 종족 유지에 필수적인 존재이다. 씨앗이 없으면 대를 이을 수 없다. 마치 자식을 낳지 않는 인간과도 같다. 이기적 유전자에 따르면 모든 생물은 유전자 운반체라는데, 생물에게 유전자를 남기는 일은 본능이다. 우리 인간과 마찬가지로 수박도 생물으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간사하게도 씨앗이 없는 수박의 개발에 몰두했다. 인류가 원하는 진화 방식이었다. 수박 이 놈, 인간 입에 들어오려면 씨앗을 당장 없애거라. 저기요, 수박의 의사는요? 그런 건 없다. 오로지 인간에 의해, 인간을 위한 씨 없는 수박이 재탄생했다. 다들 알겠지만 비단 수박만의 문제는 아니다. 벼도 감자도 옥수수도 다 인간을 배 불리기 위해 인위선택 당하지 않았는가.


뭐 음식 정도야,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무시할만한 일은 아니다. 뭐든 우리 입맛에 맞추어 편한 대로 바꾸어 버리는 일은 겉으로 보기에 개혁 같지만 폭력적이기도 하다. 인간끼리는 모두의 의견을 존중하고 차별하면 안 된다면서 민주주의를 만들어 놓고 인간 이외의 생물에게는 적용하지 않는다. 자유롭게 살 수 없고 살만 빠르게 찌는 걸로 삶의 소명을 다하게 된 돼지, 우유와 달걀 등 인간에게 필요한 물품을 제공하지 못하면 태어난 즉시 죽임을 당하는 수컷의 동물들. 어린 수송아지는 종자로서 필요가 없으면 바로 도살당한다. 그마저도 가죽을 상하지 않게 하려고 전기 충격기로 항문을 지져서 죽인다. 수평아리의 경우에는 더 지독하다. 산채로 분쇄기에 넣고 갈아버린다.


"지구상의 가장 중요하고 똑똑한 존재는 인간이니 모든 생물은 인간 앞에 넙죽 엎드리고 언제든 인간을 위해 진화의 방향을 바꿀 것을 명령하노라.." - 우리는 모두 신이 되고 싶은 거다.


다시 수박으로 돌아와 씨앗을 찬찬히 바라본다. 씨앗은 분명 내 입 속으로 들어와 나를 걸리적거리게 할 것이다. 하지만 수박씨는 우리가 먹기 편한지 나쁜지와 관련 없이 그 자리에 있어도 되는 존재다. 필요에 의해서만 존재하지 않을 권리가 수박씨에게도 있다. 우리가 이기적이듯이 수박씨도 이기적으로 살아도 되지 않을까. 수박도 "네들이 먹든 말든 나는 내 자손을 남기기 위해 씨를 잔뜩 박아두고 살 테다 "- 이런 마음을 가져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건 수박씨를 위한 마음이기도 하지만 자연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기도 하다. 문명의 이기를 거부할 수 없는 우리이지만 간혹 너무 폭력적인 방식으로 지구상의 모든 것을 멋대로 주무르며 살아온 것은 아닌지 반성하게 된다.


오늘은 수박을 먹으며 말해주고 싶다. 수박씨야, 너는 생각보다 쓰임새가 많단다.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너를 우린 물이 그렇게 우울증에 좋고 신장 기능에도 좋다는구나. 수박씨로 할 수 있는 놀이도 많더구나. 뱉어서 멀리 나가는지 시합도 할 수 있고 얼굴에 몇 개 붙었나 세는 놀이도 있더구나. 거기에 수박씨를 골라 먹으면 과식 방지도 할 수 있지 않겠니? 천천히 먹을 수 있으니까. 수박씨 고르면서 안면 근육 단련도 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니. 수박을 먹으면 불편한 점도 있지만 네가 그냥 그 자리에 있어서 좋은 점도 많단다.라고 말이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바꿀 수 있었기 때문에
바꾸지 않아도 될 것들까지 바꾸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우리가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이상 사람들의 니즈를 파악하고 그것을 개발하여 돈을 버는 일은 지극히 당연한 흐름이기는 하다. 하지만 가끔은 바꾸지 않아도 굳이 상관없는 것들에는 그냥 기분 좋게 불편해주는 것은 어떨까. 수박 씨앗을 뱉으며 즐거워하고, 포도 껍질을 벗겨 먹으며 선물 포장 뜯는 기분을 느껴보는 것은 어떨까. 너무 많은 것들을 바꿔 더 이상 인간에게 필요하지 않은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 황폐한 지구가 되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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