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실한 집안의 퀴어 앨라이로 산다는 것
작년 가을, 아버지께서 교회 장로로 취임하셨다. 어머니가 권사님으로 불린 지 3년 만의 일이었다. 두 분 슬하에서 자란 나도 독실한 기독교인일 것 같지만 나는 무교다. 언니, 오빠, 나까지 세 남매의 종교는 무교다. 다들 고향을 떠나 대학에 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교회에 발길을 끊었다. 20대 초반에겐 주말 늦잠보다 소중한 게 없기 때문일까?
이런 나와 달리 주말마다 수도권에서 고향으로 비행기 타면서까지 교회에 가는 친구가 있다. 언젠가 그 친구와, 친구의 교회 친구와 동성애에 대한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었다. 친구는 교리에 따라 동성애를 반대한다고 했다. 하나님께서 남녀만이 가능한 후손 생성으로 인류의 지속을 명하셨기 때문에, 동성애로 인한 에이즈가 주는 피해 때문에, 동성끼리 성관계하지 말라는 교리 때문에 반대한다고 했다.
나는 물었다.
"여성 간 성교는 에이즈 발생률 제로인데 그럼 레즈비언은 괜찮아?”
"동성 간 성관계를 금한다는 교리 옆에 생선 등의 음식을 금한다는 교리도 있던데 그건 안 지켜도 돼?"
"네가 사랑하는 가족이 커밍아웃하면 어떻게 할 거야?"
첫 질문에 친구들은 웃었다. 두 번째 질문엔 구약에서 금지한 것들이 신약에서 허가되기도 했다 답했다. 나는 성경을 어릴 때 대충 배우다 말아서 그렇구나 싶었다. 마지막 질문에 대한 답은 “집에서 내쫓을 거야”였다. 다정한 부모님과 그들을 쏙 빼닮은 남매. 언제나 나를 반겨주는 화목이 넘실거리는 집안이 순식간에 낯설게 느껴졌다. 더는 묻지 않았다. 서로가 서로를 섣부르게 설득할 마음이 없었다. 다행이었다.
다만 상처받았다. 집에 가자마자 권사님인 엄마에게 엄마도 그렇게 생각하냐 묻고 싶었다. 엄마는 언제나 나보다 현명한 존재였으므로. 하지만 퀴어를 혐오하는 말을 듣게될까 두려워 묻지 못했다. 대신에 성경을 찾았다. 성경은 다음과 같은 구절로 동성애를 금하고 있다.
누구든지 여인과 동침하듯 남자와 동침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지니 자기의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레위기 20:1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너 자신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태복음 22:37-38)
가장 먼저 든 의문은 동성애자는 이웃이 아닌가 하는 거였다. 신은 강자보단 약자의 편에 서는 존재라고 믿었는데 그게 아닌가 혼란스러웠다. 참지 못하고 다음 날 밥 먹을 때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동성애 반대해?"
"그렇지. 아무래도."
그렇지. 아무래도.
말에 숨은 갈퀴가 속을 할퀴었다. 갈퀴는 달빛을 반사하는 서슬 퍼런 칼날로 바뀌었다. 엄마가 퀴어를 혐오한다는 사실이 서글펐다. 사람이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을 찬반거리로 여기는 사람이었구나. 감히 실망했다.
그러나 실망에 그치지 않았다. 엄마와 나의 세대 차이를 생각했다. 자라난 환경의 차이를 생각했다. 억지로 설득하려 드는 것은 폭력임을 생각했다. 이해하려는 노력이었다. 그러다 그만 엄마가 얼마나 착한 사람인지 생각해버렸다. 그런 생각은 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 개인의 선악을 갖고 동성애 혐오를 합리화해선 안 되는데.
그러나,
엄마가 얼마나 착한 사람인지 믿고 있는 그 지점에서 희망이 피어올랐다.
용기 내서 대화를 이어갔다.
"엄마. 내가 동성애자여도 존중 안 해줄 거야?"
"너 동성애자야?"
"그건 중요하지 않아. 그런데 아니야."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동성애자가 아니라 해명하는 것은 퀴어 앨라이라고 말해온 나 자신을 배반한다는 것을. 그 외에도 수많은 역사를 배반한다는 것을. 그러나 분별하려는 시도에 실망해 대화를 그만 두기에는 엄마를 믿고 싶었다. 우선 엄마에게 안심을 줘야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엄마, 그 사람들한테는 그게 자연스러운 일이야. 남들랑 다르다는 이유로 "너 사랑하지 마. 너 목소리 내지 마." 하면 나쁜 거잖아. 누구도 남한테 그럴 권리는 없잖아. 내가 여자라는 이유로 불평등 겪는 거 잘못된 일이잖아? 그거랑 다를 게 없어."
엄마는 곤란하다는 듯이 웃더니 차별이 나쁜 거라는 말에 동의했다. 몇 분의 대화로 엄마의 '반대한다'를 '찬성한다'로 바꿀 순 없었다. 엄마는 카드 뒤집듯 변하는 세상에서 안정적으로 살기 위해 보수화 되고 있는 나이였다.
계속 대화를 이어갈수록 엄마는 제 발로 선을 넘었다. "반대한다"고 더는 말하지 않는 단계로. 동성애자를 향한 차별이 나쁜 건 맞는다고 인정하는 단계로. 퀴어도 사랑해야 하는 이웃으로 여기게 되는 단계로.
박수받으며 종결한 드라마 <마인>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트렌드가 바뀌었어요. 우리 주님 그렇게 꽉 막힌 분 아닙니다."
주님을,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성 소수자의 인권을 지지할 것이다. 그게 교리에 적힌 평등한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 중 하나임을 사람들은 곧 알게 될 것이다.
친구와 엄마와 대화를 나눈 그해, 퀴어 퍼레이드가 열리는 옆에 혐오 피켓을 든 기독교인의 시위가 열렸다. 모르는 척 넘어간 혐오가 실체로 나타났다. 그때 깨달았다. 추상적 혐오는 혐오 행동과 하나의 선 상에 있다는 것을. 둘은 연결된 폭력이라는 것을.
선량한 차별주의자의 발언도 정서적 폭력 행위라고 지적하는 사회를 만들자. 그런 사회를 만들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하는 것은 인정하는 것이다. 사랑은 그저 사랑이고, 사람은 그저 사람이라는 사실을.
프라이드 먼스를 보내며
21.07.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