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아르(Noir)'가 공개되고 난 후 많은 사람들이 "Noir"의 의미와 뮤직비디오의 메세지에 대해 다양한 해석을 내놓았다. 그만큼 선미의 누아르는 누구나가 감지할 수 있을 만큼, 난해하지 않고 명확한 메세지성을 가지고 있다. 사실, 누아르가 담고 있는 메세지는 지금까지 우리가 본 적이 없는 아주 새로운 것은 아니다. SNS에 전시되는 자신에 집착하며 일상을 망가뜨리는 현대인들에 대한 이야기는 많은 이들에 의해 중심 소재가 되어왔다. 하지만 '누아르(Noir)'는 비슷한 주제의 다른 작품들보다 더 섬뜩하고 강렬하다. 선미는 이 시대의 새로운 누아르를 정의하고 표현하는 과정에서 '이 시대의 사람들'의 모습을 스스로를 통해 노골적으로 묘사한다. 지난해에 이어 선미는 또 다른 경고(Warning)를 전달했다.
'누아르(Noir)'의 세계는 일견 선미가 지금까지 보여왔던 스타일의 것들로 채워져 있다. 공감각적이고 풍부한 사운드의 신스는 이제 선미의 시그니처나 다름없다. 복고풍의 스타일링과 인스타그램에서 볼 수 있을 법한 컬러감의 공간, 유니크한 소품들 역시 선미가 우리에게 보여왔던 것들의 연장선에 있다. 그렇지만 곡과 비디오는 시종일관 어둡고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로 가득 차있다. '가시나'에서도 '사이렌'에서도 선미는 뮤직비디오를 통해 어딘가 서늘한 씬들을 넣어오기는 했다. '누아르'에서는 손가락 사이를 칼로 빠르게 찌르다 손가락을 절단하거나, 손으로 권총 모양을 만들어 머리에 쏘며 유혈이 낭자한 이미지를 보여주거나, 바늘이 가득한 바닥을 향해 힘차게 뛰어올라 추락한다. 엽기적이고 자학적인 이러한 씬들은 'SNS'라는, 선미가 정의한 이 시대 누아르의 시공간과 결합하며 직관적이고 명료한 메세지를 가지게 된다. SNS 속 자신을 전시하며 관심과 사랑을 갈구하면서도 자기 파괴로 향하는 사람들, 특히 여성들의 모습이야말로 이 시대의 누아르라는 메세지를.
병원 침대에 누워 발로 핸드폰을 잡아 셀카 각도를 찍는 모습이나, 선풍기에 머리카락을 집어넣고 셀카를 찍는 등 뮤직비디오의 대부분의 씬에서 동일한 메세지성을 띈 장치와 요소들을 찾아볼 수 있다. 셀피 컨셉을 위해 과장되고 비현실적인 배경을 찾고 가짜 명소에 가기도 하는 모습들은 우스꽝스럽지만 섬뜩하다. 이러한 과장된 연출과 이미지는 잘못하면 현대 여성들을 향한 조롱이나 비판으로 오독되기 십상이다. 그렇지만 선미는 스스로를 이 경고의 대상으로 놓고, 온전히 자신만을 노출시켜 메세지를 표현함으로써 오독의 가능성을 최소화한다. 선미 자신이 팬과 대중의 관심을 통해 살아가는 스타라는 점에서 선미의 메세지는 더욱 공감력을 가진다. "좋아요"를 상징하는 Like, 하트 등의 아이콘들과 온라인에서 흔하게 접할 수 있는 내용의 해시태그들이 순식간에 언팔로우와 싫어요에 상처 받은 듯 반창고를 붙인 선미로 변하는 씬이 특히 그렇다. 스타로서의 삶을 살아가며 관심과 조롱을 경험하는 선미의 입장을 폭로하면서도, 이 비디오를 보고 있는 여성들의 삶 역시 다르지 않다는 의도를 동시에 전달하며 SNS 속 여성들이 놓인 학대-피학대 관계에 대한 공감을 이끌어내려 시도한다. 발화자이자 이입 대상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며 희곡과도 같은 드라마를 만들어내는 것은 선미의 특기였고, 누아르에서 이 장점은 빛을 발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지점은, 이 시대의 누아르가 무엇인지에 대해 정의하고 SNS 중심 시대의 이면에 대해 폭로하는 발화자가 선미 그 자신이라는 것이다. 그야말로 유튜브, SNS 등에서 대중들의 관심과 사랑을 필요로 하면서도 조롱과 비난, 무관심의 위협에 상처 받기도 하고 스스로의 삶을 연출하여 노출시키기도 하는 새로운 누아르의 주인공이지 않은가. 가시나, 주인공, 사이렌에서 어딘지 기묘하고 그로테스크하고 자유분방해 보였던 선미 특유의 표정과 몸짓들은 누아르의 세계에서는 단지 SNS에 보이는 자신을 연출하기 위한 수단으로 존재한다. 그것도 다분히 의도적으로. 곡이 끝난 후 거짓된 공간인 세트장에서 나가며 '현실'로 돌아가는 듯했던 선미는 차를 -오늘날 SNS에서 '힙한' 이미지로 흔하게 볼 수 있는 소품인- 불태우며 셀피를 찍으며 이 부조리한 누아르가 끝나지 않고 있음을 전달한다. 게다가 이런 메세지성을 띈 '누아르' 그 자체가 선미가 자신을 대중들에게 드러내기 위한 콘텐츠라는 사실은 그리스 비극의 운명이라는 개념처럼 압도적이고 어둡다.
지난해, 태연은 'Something New'의 뮤직비디오에서 태연의 비디오가 으레 그래 왔던 것처럼 자유로운 그의 모습을 담고 있었지만 그 결말은 암울했다. 자유분방한 태연의 모습은 TV 속의 이미지였고, 그 TV 앞에는 무표정한 태연이 그 화면을 바라보고 있는 것으로 끝났다.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여성의 이미지를 그려왔고 그로 인해 성공적인 커리어룰 만들어가던 두 아티스트가, 그 마저도 미디어 속 자신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임을 미디어 콘텐츠를 통해 폭로하는 -혹은 인정하는- 것은 매우 역설적이다. 특히나 선미는 지금의 SNS에서 유행하는 여러 요소들, 복고적인 이미지와 음악 등 트렌디하고 대중적인 감각의 것들을 조합하고 해체하고 재해석하며 자신만의 것을 만들어 왔다는 점에서, '누아르'가 향한 수신자이기도 하다. 부조리하고 아이러니한 누아르의 세계에서 선미와 태연, 그리고 SNS의 세계에 발을 걸치고 있는 오늘날의 여성들은 마치 벗어날 수 없는 굴레에 갇힌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선미의 음악은 무기력한 결정론적인 세계관과는 거리가 멀다. 선미는 반복적으로 곡 안에서 "이제 그만"라고 이야기한다. '주인공'을 통해서도 그는 자기다움을 강조하며 자유로울 것을 요구했다. 타인에게 전시되는 자신을 연출하기 위해 자기 학대를 반복하는 누아르의 베드 엔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유로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의 자유로움이 필요하고, 그것은 선미의 음악에서 늘 가장 중심적인 메세지였다. 연애 관계에서도 SNS-미디어와의 관계에서도 어떤 것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다울 것을 강조해온 만큼, '누아르'는 현실을 재생산하는 것 이상의 목적을 가지고 있다. '누아르'는 어두운 현실을 폭로하며 끝나지만, 그 이후의 이야기를 누군가가 이어나가야만 온전히 종결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SNS에 자신을 연출하고 전시하며 타인에게 인정받고 자기 가치를 증명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여성들의 몫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