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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RO Nov 04. 2019

침입 불가능한 경계, 태연

첫 번째 솔로 앨범인 [ I ]부터 [Why], [My Voice], [Something New]까지 태연은 곡을 직접 쓰는 아티스트가 아님에도 자전적이고 캐릭터성이 짙은 음악들을 발표해왔다. 일련의 앨범들은 소녀시대 활동기의 태연부터 현재의 태연에 이르는 서사를 암시하거나 상징하는 메세지와 이미지를 가벼운 팝이나 R&B, 발라드 등으로 풀어냈었다. [Purpose]디스코그래피 안에서 가장 힘과 무게감이 강한 앨범이다. 태연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음악의 주제와 중심으로 한 음악을 다각도적 해석과 리스너 개인 각자가 이입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주며 좋은 균형을 맞춰왔다. 그렇지만 이번만큼은 태연의 자신의 존재감을 다양한 해석이나 다각도적 몰입의 여지없이 가장 최전방으로 밀어붙인다.

첫 번째 트랙인 'Here I Am'부터 태연이 표현하는 'I'의 무게감은 확연히 달라져있다. 'Here I Am'의 반복적인 피아노 반주와 폭발적인 세션, 그리고 청량하고 시원시원한 고음을 내지르며 해방감을 표출하던 (혹은 유도하던) 2015년의 'I'와는 다르게 한탄하는 듯 한 코러스는 분명히 격정적이지만 동시에 폐쇄적이다. 멜로디의 흐름이 클라이맥스에 달할수록 정서는 무겁게, 깊이 가라앉는다. 타이틀 곡인 '불티(Spark)' 역시 마찬가지다. 힘을 주고 툭툭 터는 듯하다가도 가성으로 힘을 훅 날려버리는 창법과 리드미컬한 기타 세션과 드럼 비트에는 분명히 무게감이 가득하지만, 쉽게 몰입이 가능한 유연한 포인트는 없다. 앨범 전체를 대표하는 두 트랙은 [Something New]부터 돋보였던 태연의 냉소적이고 건조한 보컬과 사운드를 더 단단하게 응집시켜 확연히 달라진 무게감을 전달한다.


이러한 사운드 컨셉과 에디튜드는 초반 트랙 전반에서 강화되거나 변주된다. 희망적인 메세지의 'Find Me'에서도 태연의 에너제틱하고 시니컬한 창법과 사운드 구성은 여전히 진하게 남아있다. 소울풀한 피아노 사운드와 멜로디 라인의 'Love You Like Crazy'에서는 [Something New]의 '바람 바람 바람(Baram X 3)'이 그랬던 것처럼 러프하면서도 앨범 전체를 지배하는 폐쇄적이고 냉소적인 태도가 극대화한다. 이 극대화된 정서는 역시 완화되지 않은 채 정돈되지 않은 사운드를 R&B적인 구성으로 풀어낸 '하하하(LOL)'에서 더욱 직설적으로 드러난다. 베이스를 최소화한 이전 트랙들과는 달리 소스와 블루스 리듬의 텐션을 긴장감 있게 엮어내고 조곤조곤 벌스를 이어가다 코러스에서 비웃음 섞인 분노를 담아낸 듯 한 보컬을 채워 넣은 'Better Babe'에서 앞선 트랙들의 정서가 사실상 폭발한다. 뒤이은 트랙부터는 앞선 곡들을 꽉 채우고 있던 힘을 풀고 부드러운 사운드로 앨범을 풀어나간다. 그렇지만 이 곡들은 '만약에'와 같은 태연표 발라드와 같이 쉬운 몰입이나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다. 여전히 건조하고 관조적인 태도를 고수하고 있으며, 단지 여유를 좀 가미했을 뿐이다. 특히 차갑고 재지한 'Do You Love Me'나 도회적이고 멜로우한 'City Love'와 같은 곡에서는 전반부의 날 선 정서를 중화하며 빈티지한 사운드나 장르성을 전달한다. 그렇지만 후반부 곡들 역시 단단하게 구성된 사운드와 태도로 채워져 있으며, 후반 트랙에서 잠시 풀어졌던 긴장감과 냉소는 'Blue', '사계 (Four Seasons)'를 통해 다시 조성된다. 그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앨범의 처음과 끝은 홀가분하면서도 폐쇄적인 사운드와 정서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구성과 태도는 자전적이면서도 다채로운 팝 앨범이었던 [My Voice]나 다양한 스타일로 앨범의 재미를 담아냈던 [Something New]에 비해 단조로움이나 필요 이상의 긴장감으로 인한 피로를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게다가 [My Voice]가 그랬던 것처럼, [Purpose] 역시 아델과 같은 아티스트들의 레퍼런스가 곳곳에서 엿보이기는 한다. 초기의 솔로 앨범들이 가지고 있었던, (그리고 대부분의 아이돌 팝 앨범이 관습적으로 따르고 있는) 팝 트렌드의 조합을 넘어 2집에서는 태연만의 건조하고 시니컬하고 어두운 면을 극대화한 것 역시 영미권의 많은 여성 팝 아티스트들이 거친 스타일 변화이다. 이러한 앨범 구성은 분명히 아주 새롭거나 재미있지는 않다. 그렇지만 이러한 구성에 의도가 분명하고, 그 의도가 설득력을 가진다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진다. 태연이 지니는 차이점이자 차별점은, 태연은 자신을 내세우기 위해 컨셉이나 이미지, 장르의 표면적 변화 뒤에 숨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신 그는 [Purpose]를 통해 운드가 허용하는 한계까지 자신의 존재감으로 채워놓은 경계를 단단하게 그어놓았다. 태연은 더 이상 타인의 얄팍한 이해를 구하려 하지 않는다.


태연은 이미 10년이 넘는 활동 기간 동안 아이돌 팝 씬과 리스너들의 인식 안에서 존재감과 서사를 이미 확보했다. 그렇지만 이제야 2집을 발표한, 솔로 가수로서는 비교적 신인에 속하는 그이기에 앞으로 어떠한 디스코그래피를 쌓으며 확실한 음악관을 구축하게 될지는 아직 미지수이다. 그렇기만 [Purpose]와 현태의 태연이 변화의 의도를 구구절절 설명하거나 우리에게 공감을 요청하고 있지 않다는 점은 분명하다. 지금의 태연은 그 어느 때보다 굳건하고 묵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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