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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리 Jul 14. 2019

퇴사를 결심했어도 사무용 슬리퍼는 샀다.

이것도 내 인생이니까

취준이 유독 길고 힘들었던 나는 아직도 첫 입사 합격 소식에 설레어 밤잠을 설치던 그 날이 생생하다.


정해진 입사 날짜까지 약 10일의 시간이 있었고, 그 시간을 어떻게 알차게 보낼까 고민하다가 수중에 있는 돈을 탈탈 털어 유럽행 비행기 표를 끊었다. 앞으로 펼쳐질 장밋빛 앞날을 상상하며 이제 진짜 사회인이 되었다며 자축의 의미로 스스로에게 선물한 여행이었다. 그렇게 떠난 2월의 유럽은 오후 3시만 되면 해가 떨어졌고, 날씨는 겨울왕국이 따로 없었지만 짧은 낮 시간의 소중함에 발을 동동 구르며 여행 루트를 짰고 잠시 비춘 햇볕의 따스함에 감동하며 다녔다. 주로 예쁜 레스토랑이나 전시회를 찾아가는 등 실내 위주의 활동을 했고, 이동 중간중간 몸을 녹이기 위해 아늑한 카페에서 여유를 즐기기도 했다. 당시 열흘간의 여행을 떠올리면 지독한 추위와 함께 기대로 충만했던 나의 행복이 생각난다.

그게 벌써 2년 전이다. 직딩 3년 차에 접어들고 보니 그때 그렇게 떠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입사 이후 3일 이상 연차를 쓰고 긴 여행을 떠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지난 2년간의 직장 생활도 무탈하게 잘 지냈다. 내가 몸담은 업계는 의류 제조업인데 걱정과 달리 업무의 강도도 괜찮았고, 운이 좋게도(?) 신사업부에 소속되어 제조업보다는 마케팅과 홍보 쪽 일을 경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꿀 같은 시간도 올해 들어서 끝이 났다. 연초에 ‘조직 개편’이라는 명목 하에 칼바람이 불었고, 그 여파로 우리 팀은 공중분해가 된 것이다. 그리고 나는 회사에서 가장 빡세다는 팀으로 굴러 들어오게 되었다. 빡세다고 혀를 끌끌 차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첫 번째는 성미가 급한 팀장이 아랫사람을 힘들게 한다는 것이었고, 다른 한 가지는 업무의 양이 절대적으로 많다는 것에 있었다. 직장인에게 업무와 사람 스트레스 말고 또 뭐가 있겠냐마는!


이 팀의 막내 포지션으로 들어온 나는 몰아치는 업무와 기존 팀원들의 텃세에 맨몸으로 부딪혔다. 업무 설명을 들으면 한 번에 다 소화해내길 기대했던 사수를 만났고, 유독 질문이 많았던 나는 그 수만큼이나 많이 혼났다. 화장실에서 숨죽여 우는 날이 잦아졌고 야근은 일상이 되었다. 그렇게 한순간에 좋았던 회사가 괴로움으로 가득한 공간이 되어버렸다.


오랜만에 칼퇴를 한 날이었다. 해는 점점 길어지고 가로수는 하루가 다르게 울창해지던 5월의 어느 퇴근길, 밝은 저녁에 회사를 나와 집으로 가는 길이 참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어색한 마음이 이내 슬퍼지면서 눈물이 났다. 그렇게 나는 퇴사를 결심했다.


그런데 퇴사라는 마지막 카드가 회사 내에서 받는 스트레스에 특효약이라는 것을 안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이다. 회사를 떠나는 것은 상상도 안했던 지난날에 비해 언제든지 떠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바뀌자 이 공간에 있는 것도 나의 선택 중의 하나임을 좀 더 선명하게 인지할 수 있게 되었다. 최악의 경우라고 해봤자 짤리는 것인데 그것조차 더 이상 두렵지 않으니 그토록 괴로울 이유가 없는 것이었다. 퇴사 후 어떤 일을 할지 정하지 않은 상황에서 무작정 떠나는 것은 사실 두렵다. 그럼에도 퇴사라는 선택지가 내 마음속에 있다 보니 나를 옥죄어 오던 회사일에 대한 의무감이 조금은 덜어지면서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업무 특성상 이리저리 움직일 일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사무용 슬리퍼 하나 없이 잘 지내왔다. 업무의 양이 많아지자 슬리퍼의 필요성을 절감했지만 그만큼 퇴사도 간절해졌기 때문에 새로운 사무용품에 대한 구입 욕구가 바닥을 쳤다. 그러나 나는 퇴사를 결심한 그 주 주말, 사무용 슬리퍼를 샀다. 회사에서 일하는 시간도 나의 소중한 삶의 일부라는 것을 좀 더 깊이 깨달았기 때문이다. 얼마든지 회사를 박차고 나갈 수 있다는 선택지는 업무로 인해 괴로워할 시간도 아깝게 만들었다. 회사에 있는 시간은 내 하루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데 그 시간을 스트레스로 점철하면 나에게 너무 손해인 일이 아닌가! 업무 시간도 온전히 나를 위한 시간이다. 왜냐하면 이 노동 시간을 바쳐 내게 필요한 한 달 생활비를 얻어가기 때문이다. 이 돈으로 떡볶이도 사 먹고 예쁜 옷도 사 입고 여행도 가지 않았는가. 이 인과관계에만 집중하면 조금 견딜만하다. 슬리퍼는 이러한 맥락에서 산 사무용품이다.


회사에 있는 단 한 시간도 소중한 내 인생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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