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빨래, 농담

우리 빨래는 누가 해줘?

by 카밀리언

장례식장은 늘 비슷한 공기를 품고 있다. 국화꽃 향과 은은히 퍼지는 향 냄새, 그리고 조심스럽게 발을 옮기는 사람들의 발소리.


그날도 그랬다. 오랜만에 검은 정장 차림으로 마주 앉은 우리는 식사를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요즘 어머니 건강은 어때?"


 무심코 던진 내 질문에 친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요즘 엄마가 자꾸 그러셔. 온몸이 안 아픈 데가 없는데, 이렇게까지 살아야 하나 싶대."


 순간 공기가 무거워졌다. 장례식장이라는 공간이 그 말에 더 큰 무게를 실어주는 것 같았다. 위로의 말을 겨우 생각해 내고 입을 열려는 찰나, 친구가 먼저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랬더니 우리 누나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 '그럼 우리 빨래는 누가 해줘?'라고 하더라고."

 친구의 목소리에는 웃음이 섞여 있었다.


 "그랬더니 엄마가 뭐라는 줄 알아? '세탁기 있잖아' 하시면서 또 웃으시더라."


 나는 가만히 그 장면을 떠올려 보았다. 죽음, 빨래, 농담. 서로 어울릴 리 없는 것들이 한자리에 섞이자, 오히려 삶의 장면이 더 선명해졌다. 비극이 웃음 앞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슬픔이 일상의 사소한 언어에 기댄 채 조용히 풀렸다.


 친구의 누나는 어머니의 무거운 말을 정면으로 받아내지 않았다. 대신 일상의 가벼운 언어로, 웃음으로 받아쳤다. '당신이 필요해요'라는 진지한 고백 대신 '빨래'라는 소소한 일상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어머니도 버럭 화를 가장한 농담으로 그 자리를 데워주셨다.


 그 순간, 나는 삼 년 전 돌아가신 할머니를 떠올렸다.


 지병으로 침상에 오래 누워 계셨던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전 자주 그런 말씀을 하셨다.


 "나이 먹으면 죽어야 하는데 다 늙은 노인네가 지금까지 살아서 괜히 너희들, 이 고생을 시키는지 모르겠다."


 "왜 자꾸 그런 말씀하세요. 그러지 마세요."


  그때마다 우리 가족은 인상을 찌푸리며 어설픈 위로를 건넬 뿐이었다. 진지하고, 무겁게, 그리고 불편한 표정으로.


'같이 웃어볼 생각은 왜 하지 못했을까?'


가볍게 받아칠 용기도, 지혜도 없었다. 그저 외면하고, 부정하고, 가슴 아프기만 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할머니는 위로를 원하셨던 게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말은 예전과 같은 평범한 대화의 시작을 원하는 것이었을지도, 혹은 그저 일상 속 한숨처럼 자연스러운 독백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우리 가족은, 아니 나는 그 말을 너무 무겁게만 받아들였다. 할머니의 말에 웃음으로 화답할 여유가 없었다.


 '그럼 우리 빨래는 누가 해줘?'


 친구 누나의 그 한마디가 자꾸만 귓가에 맴돌았다. 그건 단순한 농담이 아니었다. 무거운 것을 가볍게 들어 올리는 힘이었다.


 웃음은 때로 무책임해 보인다. 진지하지 못하고, 가벼워 보인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웃음이야말로 가장 용기 있는 반응일 때가 많다. 슬픔을 외면하는 게 아니라, 슬픔 속에서도 삶을 긍정하는 것. 죽음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죽음 앞에서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것.


 친구 누나는 어머니에게 말했다. 당신이 필요하다고. 다만 그 말을 '빨래'라는 일상의 언어로 포장했을 뿐이었다.


 그제야 그 당시 할머니의 독백에 대답했어야 할 대사를 머릿속에 늘어놔 보았다.


'그럼 맛있는 김치는 누가 해줘요?' '할머니표 된장찌개는 아무도 못해요.'


 죽음은 비극이다. 하지만 그 비극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끝까지 삶을 놓지 않는 것이다. 웃음으로, 일상으로, 사랑하는 사람과의 대화로.


장례식장을 나서며 나는 마음속에 작은 약속을 품었다.


언젠가 다시 무거운 말을 듣게 되더라도, 웃으며 답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겠다고.


그게 삶을 지켜내는 가장 단단한 방식이라는 걸 배웠으니까.


 세탁기가 있어도, 누군가의 손길은 여전히 필요하다. 그 필요함을 웃으며 말할 수 있는 용기, 그리고 그 말을 웃으며 받아줄 수 있는 여유. 그것이 우리가 삶을, 그리고 당신을 사랑하는 방식이 아닐까.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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