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가장 두려웠던 일 한 가지를 꼽자면 두 딸의 진로와 결혼문제였다. 무엇보다도 내 삶을 답습하는 게 아닐까 전전긍긍, 두려움에 휩싸여 살다 보니 어느새 황혼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우려했던 일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안개처럼 사라지기 시작했고 참 예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큰딸은 지독히도 나를 많이 닮았던 탓에 늘상 우울증에 시달렸고 중고등학교 시절 제대로 된 친구 하나 없었다. 꿈도 비전도 없었던 큰 딸은 가장 아픈 손가락이 자, 내 자화상이었다. 사실 딸아이가 그렇게 된 데는 우리 부부의 불화가 큰 이유라는 것을 알기에 오랜 세월을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하루에도 수십 번 수백 번 남편도 모르는 눈물을 흘렸었다. 큰딸이 아빠에게 갖는 반감들이 너무나 컸던 까닭에 아이는 연예에 아예 관심조차 두지 않았고 평생 독신으로 산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었다. 어떤 사람은 딸아이를 향해 직장생활도 힘들 거 같고 결혼도 쉽지 않을 것이라는 악담을 퍼붓기도 했는데, 그 말이 비수처럼 내 심장을 난도질했다. 이대로 무너질 수 없다는 생각에 언젠가 딸아이가 당당하게 세워질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다.
그날 이후로 끊임없이 아이를 격려했고 위로했고 친구가 되어주었다. 딸아이는 조금씩 회복이 되었고 대학을 졸업하면서 가장 걱정했던, 직장생활도 잘 해냈다. 딸에게는 유일한 취미가 있었는데 바로 요리였다. 딸을 위해 대학 1학년 무렵 요리학원에 등록을 해주었는데, 1년 만에 한식, 중식, 양식, 바리스타, 제빵 등 자격증을 무려 5개나 취득을 했다. 직장을 다니면서 요리사의 꿈을 키웠던 딸아이는 적금이 만기가 되던 날 사표를 내고는 자신의 꿈을 찾아 연고지 하나 없는 캐나다로 날아갔다. 우여곡절 끝에 어렵사리 잡은 첫 일터에서 만난 총셰프는 한국인이었는데, 심한 갑질 때문에 삼 개월을 못 버티고 그만둔 사람들이 꽤 있었다는 말에 딸아이가 걱정이 되었다. 워낙 잘 참는 성격 탓이었는지 그 밑에서 일 년을 버텼고, 그곳에서 지금의 사위를 만나 결혼도 했다. 사위 말인즉 진짜 힘든 위기들을 잘 넘기는 모습에 반했었다는 말에 고마움보다 가슴이 아려왔다. 그렇게 죽을 고생을 하면서 언어와 요리에 대한 경험을 쌓아가기 시작했다. 정말 감사했던 일은 자신의 버킷리스트 중에 한 가지였던 요리사의 길이 단순한 꿈이 아닌 실현이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딸아이가 자신감을 갖게 되면서 영어도 많이 늘었고, 한국에서보다 훨씬 안정적인 시간들을 즐기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여러 날을 울었다. 좋아서 울고 내 설움에 울고 또 큰 숙제를 해결한 듯 한 마음에 눈물이 끊이지 않았다. 제대로 해준 것도 없었는데 딸아이 스스로 험난한 고지를 등반하는 인내를 감내했고 그 결과 그토록 원했던 요리사의 길로 한 발 내딛게 되었다. 아직은 큰 역할은 아니지만 그래도 현지인들과 당당히 일터에서 자신의 몫을 해내는 것을 보며 이제야 한시름 놓게 되었다.
작은 딸은 내가 허전해할까 싶어 퇴근 후 가끔 일부러 나를 찾아와 데이트도 하고 맛있는 것도 사주고 갈 만큼 참 착한 딸이다. 나는 힘들게 젊은 시절을 허비하다시피 보냈지만 두 딸만큼은 아름답고 당당하게 살아주기를 바랐던 일들이 조금씩 고지가 보여 가기에 너무나 감사하다.
수십 년을 살다 보니 어느새 희끗희끗 흰머리도 올라오고 주름들도 계속 늘어가지만, 그만큼 삶의 여유를 즐기는 법도 조금씩 터득을 했다.
나를 힘들게 했던 사람, 배신 등, 많은 일들을 겪긴 했지만 알고 보면 나쁜 사람은 하나도 없고 다만 나쁜 마음이 문제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선한 양심을 고수한다는 게 때로는 어리석게 보이지만, 손해보고, 이해하는 그러한 가치관이 반드시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 다시 하나둘씩 나를 찾아왔고 그리워하고, 만나기를 원하는 모습을 보며 실패한 인생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