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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서기 Aug 30. 2021

딸딸이 엄마

진짜 아들이 좋아?

신랑은 딸보다 아들을 너무나 원했다. 자신이 외롭게 자랐기 때문인지, 보수적인 성향 때문이었는 지는 몰라도 결혼을 하면서부터 아들에 대한 생각이 더 확고해지기 시작했다. 그런 까닭에 나 역시 당연히 아들을 낳게 될 줄로 생각했었다. 그랬었는데 남편의 바람과는 달리 딸만 둘을 낳은 것이다.


큰애를 낳고 기진맥진 지쳐있었을 때 딸을 낳았다는 소식을 듣고도 남편은 일주일이나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친정부모님은 일때문에 여러달 미국머물고  계셨는데 급한 일정 탓에 입국이 여러달 지체되었던 까닭에 내 출산을 보지 못하셨다.

퇴원 후 한 달 정도 친정오빠 집에 머물면서 몸을 풀게 되었는데, 신랑도 없고 친정엄마도 없이 마치 버려진 듯 홀로 남겨진 나와 내 딸을 보면서 심장이 끊어질 듯 통곡했다.


딸은 자지러지듯 울어댔으나 나는 젖을 물릴 힘 조차 없었다. 새벽시간에 식구들이 깰까 싶어 이불을 뒤집어쓰고는 밤마다 눈가가 짓무르도록 눈물을 쏟았다. 그렇게 한바탕 눈물을 쏟고 나면 아침이면 눈가가 퉁퉁 붓기 일쑤였다. 주머니에 있던 20만 원을 병원비로 지불하고 나니 지갑엔 십 원짜리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작은 딸을 출산했던 날 역시 신랑은 열흘 가까이 오지 않았다. 그즈음 겪었던 일은 지금까지도 아픔으로 남아있다. 공교롭게도 작은 딸을 해산할 때도 부모님은 외국에 계셨다.


당시 새언니가 내 산바라지를 도와주었는데, 물론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다만 먹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요구할 수 없었다는 게 지금도 마음이 아프다.

작은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쉬고 있을 때 새언니가 간식을 한 아름 사들고 왔다. 그중에 캔 포도가 있었는데 그릇에 덜어서 조카들과 내 앞에 내밀었다. 얼마나 맛이 있었던지 작은 한 접시가 개눈 감추듯 사라졌는데, 더 달라는 소리가 안 나왔다. 뚜껑을 따지 않은 캔 포도가 몇 개 남아있었으나 새언니는 더 먹고 싶냐는 말도 없이 그것을 냉장고에 넣어버렸다.


당시 수중에 돈 한 푼 없던 나로서는 친정엄마가 너무나 원망이 되었다. 큰 아이 때도 곁에 없었는데 작은 딸을 출산할 때마저 안 계신다는 사실에 가슴이 미어졌다.

물론 사정이 있었다는 것을 잘 알지만 수십 년이 지나서도 그 일은 비수처럼 남아있었다.




신랑은 평소에 운동을 너무나 좋아했고 운동 소모임을 통해 여러 사람들과 친분을 유지했다. 외향적인 성격 덕분에 사람들과의 관계성도 좋았고 호탕한 성격 덕분에 인기도 많았다. 그러나 지나치게 강한 성격 탓에 남편을 대하기가 너무 어렵고 힘들었고 눈치를 볼 때가 많았다. 마치 신랑은 대기업 사장이고 나는 한낱 여사원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하루도 마음 편하게 대화를 나누어본 기억이 거의 없다.


                                                             일러스트 '반서기'



반면 나는 본시 어려서부터 우울한 성향이 심했었다. 혼자 있기를 좋아했고, 누군가가 다가오기라도 하면 나는 즉각 차단하고 밀어냈었다. 친구도 없었고, 하고 싶은 것도 없었고, 꿈도 없었던 시절, 인생의 회의를 경험하게 된 것이 우울증본격적시작점이었다. 그때가 고등학교 입학을 막 앞둔 때였다.


사회인이 되면서 친구 소개로 지금의 신랑을 만났고 그렇게 한 사람의 아내가 되었다.

지금도 신랑에게 미안한 것이 있다면 마음의 병을 가득 안고 결혼이라는 것을 강행했다는 점이다.

평범하지 못한 아내를 만난 남편 역시 어찌 보면 피해자 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때가 있었다.

내가 스스로 선택한 결혼이니만큼 그 책임도 내게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두 딸을 위해 큰 소리 내는 것조차 조심했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두 딸에게는 유치원 시절부터 대학 때까지 단 한 번도 공부하라는 잔소리를 한 적이 없었다. 그냥 곁에서 함께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힘들 때마다 눈물의 기도를 쏟은 것밖에는 한 것이 없었는데 감사하게도 아이들은 말썽 한번 피우지 않고 잘 자라주었고, 성격 좋은 짝은 만나 결혼도 했다.




언젠가 신랑이 지인들과의 술자리에  후배에게 어떤 얘기를 건넨 적이 있었다. 그 얘기를 듣는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내 평생 가장 후회가 되는 일이 있다면 아내가 출산할 때 함께 하지 못했다는 점이야. 그게 지금도 큰 한으로 남아 있네. 너무도 후회가 돼. 자네는 아내가 아이를 낳을 때는 꼭 반드시, 자리를 지켜주게."

   

남편도 나도 철없던 시절이 아니었던가!

나 역시 한때 잘못된 신앙에 빠져 수년간 신랑을 많이도 힘들게 했었다.  신랑도 나도 서로가 조금씩 인내했던 부분이 있었기에 가정이 해체되지 않고 지금까지 유지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이 이 가정을 이끌어오셨음이 분명하다.

지금은 나도 신랑도 서로의 바라기가 되어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다.

     

캘리그라피 '반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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