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 속에 감추인 사랑
2001년 무렵 우리 집에 IMF 때보다 더 힘든 불경기의 바람이 불었던 적이 있었다.
결혼 이후 남편은 일을 쉬어본 적이 없을 만큼 생활력이 강했지만 워낙 경기가 좋지 못한지라 우리 집에도 그 태풍이 불어 닥친 것이다.
한참 돈 들어갈 무렵에 어려움이 생기다 보니 막막하기만 했다.
생활력 강하고 책임감이 남달랐던 남편이 힘들어하던 차에 친정어머니의 권유로 호떡 포장마차를 시작했다.
일주일을 고민 고민하는 가운데 노점 장사야 말로 빠른 시간 안에 돈을 모을 수 있다는 말에 체면 걷어붙이고 장소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며칠 발품을 판 덕분에 적당한 자리를 발견하게 되었고 장사에 필요한 여러 기물들이 도착한 다음날부터 바로 일을 시작했다.
이때만 해도 그 자리에 노점이라고는 나밖에 없었다. 참 다행이다 싶었고 하늘이 돕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르바이트까지 둘 정도로 호떡은 그야말로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재료는 금방 동이 났고 일을 마치고 집에 와서 두 딸과 함께 코 묻은 돈 세는 재미에 푹 빠져 있을 즈음 갑자기 노점이 하나 둘 생기더니 호떡 포장마차, 계란빵 파는 차, 과일 차, 닭 파는 차, 붕어빵 노점 등 여러 먹거리 포장마차가 생기는 바람에 손님의 입맛이 분산이 되어 매출이 절반 이하로 뚝 떨어져 버렸다.
얼마 동안은 단골손님에 의해서 겨우 유지가 되었으나 하루가 멀다 하고 길 건너 호떡 파는 부부가 와서 날마다 방해를 하는 바람에 그마저도 힘들어졌다.
급기야는 자전거를 리어카 앞에다 가리고는 오는 손님들을 못 오게 막으며 험한 말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날 하필이면 딸이 그 장면을 보게 되었는데 내가 바보처럼 어버버 하며 제대로 말을 못 하자 급기야는 나를 뒤로 밀어내더니 그 아줌마에게 와다다다 쏘아붙이기 시작했다.
그 여편네는 마귀처럼 눈알을 굴리다가 딸아이가 따발총처럼 쏘아대는 말이 분했던지 한마디 던졌다.
“이 어린년이 어디서 어른한테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지랄이야. 네 에미가 너 그렇게 가르치디? 하긴 그러니 호떡이나 팔고 있지.”
순간 분노가 일었지만 당황하면 할 말을 잃어버리는 내 성격 탓에 아무런 대응도 못하고 그대로 얼음이 되고 말았다.
그때 딸아이가 달려들어서는 폭탄 같은 말로 쏘아붙이기 시작했다.
“그럼 눈을 동그랗게 뜨지, 네모 낳게 떠요 참나?”
이러는데 순간 너무 웃겨서 입꼬리가 실룩거렸다.
세상에나 그 상황에서 어떻게 그런 유머 감각이 발동이 되는지 내 딸이지만 진짜 대단했다.
그 아줌마는 한 마디도 지지 않는 딸을 보며 분했던지 연신 씩씩거렸다.
“너 어느 학교 몇 학년 몇 반, 이름이 뭐야? 내일이라도 당장 학교로 가서 네 년이 얼마나 싸가지 없는지 다 말해야겠다.”
“학교로 찾아오면 뭐 내가 겁낼 줄 아세요? 저요 부평여고 3학년 4반 ㅇㅇㅇ이예요. 교무실로 와서 제 이름 대세요.”
물론 딸아이가 잘했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 상황에서 엄마 편을 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렇게 한창 고성이 오가던 중 끝날 기미가 안보이자 어쩔 수 없이 남편을 호출했다.
노점을 시작하면서 남편이 노점 근처도 오지 못하게 했었는데 남편이 도착하면서 상황은 일사천리로 정리가 되었다.
우리를 잡아먹을 듯이 달려들던 그 부부는 남편이 등장하자 꼬리를 내렸고 딸 역시 아빠를 보자 좀 전에 당찼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눈물을 한 바가지나 쏟아냈다.
큰아이는 점심시간마다 교복 입은 채로 와서 호떡 굽는 일을 도왔는데 미안하기도 하고 고마운 마음에 학교로 돌아갈 때는 양손 가득 호떡을 안겨 주었다.
한참 먹성 좋은 친구들 덕분에 호떡이 큰 인기를 끌었는데 딸이 호떡을 들고 가면 한바탕 난리가 날 만큼 호떡이 특별한 간식이 되었다는 후일담을 들려주었다.
그렇게 딸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몇 달 동안이나 내가 있는 노점을 찾아왔고 교복에 기름 냄새가 배인 체 다시 학교로 돌아가면서도 당당한 모습에 눈물이 날 만큼 고맙기도 했고 큰 힘이 되어주었다.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일을 하려고 장소에 나가보니 내 자리에 있어야 할 리어카가 온데간데없이 자취를 감추어 버린 것을 발견하고는 크게 당황한 일이 있었다.
오전 일찍 단속이 왔었는데 내 리어카만 끌어갔다는 말을 들었다.
망연자실 서있자 평소 친분이 있었던 붕어빵 사장님이 내게 귀띔을 했다.
"이봐 호떡, 아마 저 길 건너 호떡집 여편네가 신고를 했을 걸? 다른 데서는 흔히 있는 일이야."
전날 밤늦게 친구가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에 문병을 다녀오는 바람에 미쳐 시간을 놓쳐버린 것이다.
벌금을 내고 리어카를 찾아 서둘러 일하던 장소로 갔으나 내 자리에서 이미 그 부부가 장사를 하고 있었다.
그 부부의 조소하는 듯한 눈빛을 뒤로한 채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는데 그 모멸감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 아픔으로 남아있다.
그곳에서는 더 이상 장사를 할 수가 없어서 임시로 아파트 단지에 리어카를 세워두자 반나절도 안 되어 입주민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다음날이 마침 일요일이었고 딸과 함께 일할 만한 장소를 찾아 이리저리 리어카를 끌고 다니며 참 많이도 울었다.
그때 딸아이가 미처 생각지도 못한 제안을 했다.
“엄마 실은 내가 학생과장님에게 엄마가 교문 앞에서 호떡 팔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을 드렸었는데 해도 된다고 허락을 하셨어. 지금이라도 당장 옮기자 엄마.
점심시간에 잠깐 나와서 도울 수도 있고, 저녁에 야자 시간 전에 도울 수도 있고 공부 끝나고 같이 들어가면 되는데 엄마가 이렇게 힘들어하는 거 도저히 못 보겠어.”
“무슨 소릴 … 교문 앞에 가면 네 친구들도 볼 거고 아무래도 그건 좀 말이 안 되지.”
“호떡이 어때서? 오히려 난 그런 엄마가 자랑스러워. 그러니까 마음 쓰지 않아도 돼. 수능 끝나면 내가 할게 학비도 벌고 엄마 호강도 시켜주고 그럴 거니까 조금만 고생해 엄마. 아빠 일도 곧 풀리겠지.”
순간 가슴이 뜨거워졌다. 비록 가진 것은 없지만 천하를 얻은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남편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굉장히 놀라는 눈치였다.
딸이 대학 졸업 후 직장에 다니던 중 자신의 꿈을 찾아 캐나다로 떠난 지도 어언 십오 년이 되었다.
딸은 현재 캐나다 시민권자로서 그곳 현지에서 요리사로 일하며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갖고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딸이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노라면 한때 힘들었던 그 시절을 웃으면서 이야기할 만큼 여유가 생겼다.
큰 딸도 나도 세월의 바람을 함께 맞는 나이가 되면서 부쩍 더 의지하게 된다.
남달리 두려움이 많은 내게 딸은 언제나 든든한 후원자처럼 힘과 용기를 북돋워주었다.
학창 시절 이후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나는 다른 사람에 비해 여러모로 부족함이 많았다.
적지 않은 나이에 뭔가를 시도하려다 보니 마음만 급하고 실수연발이었다.
작업실에 틀어박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그림을 그리고 글을 끄적대면서도 마음속에서는 언젠가 이 하나하나가 빛을 발할 날이 반드시 오리라는 일말의 희망을 품었다.
그랬던 내가 작품을 나누는 사람 캘리그래피 강사 즉 캘리그래피의 가치를 파는 사람으로 누군가를 위로하고 힘이 되는 위치에까지 오르게 된 것이다.
지금은 오랫동안 몸담아왔던 문화센터가 폐쇄하는 바람에 강사를 그만두고 일대일 수업에 매진하고 있다.
이렇게까지 된 데에는 가족의 응원도 컸지만 무엇보다도 큰 딸의 지속적인 지지와 용기가 큰 힘이 되었다.
한때 지독한 열등감에 휩싸여 삶의 의미조차 놓고 살았던 내가 이제는 누군가에게 용기를 주고 희망을 주는 브런치 작가, 일러스트 작가이자 시인이 되었다는 사실이 생각하면 눈물이 날 만큼 감사하다.
그 일면에 늘 딸이 있었고 주변에서는 엄마와 딸의 역할이 뒤바뀌었다고 할 만큼 딸은 내게 특별한 존재였다.
쉬지 않고 달려온 지금의 시점에서 생각해 보면 아쉬운 것도 많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내면 속에 늘 드리워졌던 먹구름들을 발판 삼아 한 발 한 발 내딛다 보니 어느새 용기가 생기고 자신감도 생겼다.
"엄마는 똑똑하고 예뻐, 엄마는 특별해”라고 용기를 북돋워주는 소중한 딸이 있어서 감사한 하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