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년 전, 사표를 썼다.
당시 수배전반 영업팀에 있었는데 유별난 성격을 가진 고객을 대응하는 것이 너무 피곤하고 힘들었다.
영업사원이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 힘들면 그만두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물론 팀장님과 동료들은 왜 그러는 거냐고 만류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능력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좀 쉬고 딴 길 찾아보겠습니다.”
“한창 돈 벌어야 할 시기인데 뭐 먹고살려고…?”
“글쎄요.. 정 안되면 라면 먹고살겠습니다. “
“아…. 라면…”
그렇게 사직 의사를 밝히고 업무 인수인계를 진행했다. 당시 후배들은 나를 라면 열사라고 불렀다. (라면 먹고살겠다는 말이 그렇게 파장을 일으킬 줄은 몰랐다.)
사실 퇴사를 결정했을 때 가장 걸리는 부분이 하나 있었다.
바로 사귄 지 몇 달밖에 안 된 여자친구였다. 회사를 그만두면 내 사정을 말하고 헤어져야겠다고 생각했다.
“나 백수 될 건데.. 나랑 같이 라면 먹고살래? “
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 부분이 가장 마음에 걸리고 여자 친구에게 미안했다.
그렇게 업무 인수인계를 하며 퇴사일이 다가오는 어느 날이었다.
배전기술팀의 이 부장님께서 날 찾아오셨다.
“회사 그만두겠다고 했다면서?“
“네. 죄송합니다.“
“회사생활하다 보면 고비가 찾아온다. 그래도 그렇게 성급하게 결정하면 후회한다. 그러지 말고 나랑 같이 일할래?“
“말씀은 감사하지만 전 기술적인 거 아무것도 모릅니다. 짐만 될 거 같아요.“
“처음부터 아는 사람 있냐? 내가 책임지고 가르쳐줄게… 나 한번 믿어봐.“
뜻밖의 제안에 좀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고마웠다.
헤어지고 나서도 나 한번 믿어보라는 말이 자꾸 생각났다.
얼마간 고민하던 나는 결국 새로운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 부장님은 즉시 내 팀장님을 찾아갔고 팀장님도 흔쾌히 나를 배려해주셔서 팀을 옮기기로 합의했다.
그렇게 배전기술팀에서 이 부장님과 일을 하게 되었다.
주요 업무는 전기설계회사, 엔지니어링 회사를 방문하여 도면작업, 시방서, 예산용 견적서 등을 기술지원하며 신규 PJT 정보를 얻고, 자사 제품을 SPEC-IN 하는 것이었다. 궁극적으로는 우리 회사가 신규 프로젝트의 수배전반을 수주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었다. 이 일을 하면서 전기도면 보는 법, 견적하는 법, 시방서 작성 등을 배웠다.
쉽지 않았지만 재미있었다. 이 부장님의 전기적 지식은 정말 놀라웠다.
수배전반, 전기계통 설계에 대한 지식뿐만 아니라 새로운 기술적 제안 등의 능력이 대단하셨다.
설계사를 같이 방문해 기술 자문을 하면 고객은 이 부장님의 탁월한 지식과 기술적 제안에 놀라곤 했다. 물어보지도 않은 큰 프로젝트를 먼저 이야기하고 이 프로젝트 같이하자고, 좀 도와달라는 말을 많이 했다.
‘아…이 사람은 진정 수배전반 기술의 마스터…달인이다.’
옆에서 보면서 참 많이 감탄했다.
하지만 일에 대해서는 굉장히 엄격하고 한 성격 하셔서 내가 실수하거나, 잘 모를 때는 아주 호되게 혼내셨다. 박살 나도록 깨지면서도 고마웠다. 나에 대해 기대가 없거나 포기했다면 혼내지도 않는다는 것을 사회생활하면서 충분히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 부장님께 눈물 쏙 빠지게 혼나는 일도 많았지만 그만큼 나도 조금씩 성장했던 것 같다. 내가 기술 지원하고 SPEC-IN 한 프로젝트를 영업팀에서 수주할 때 나의 성취감과 보람은 컸다. 영업사원에게 ‘형이 도와줘서 수주할 수 있었다’는 말을 들을 때 참 기뻤다.
1년, 2년, 3년, 4년, 5년… 이렇게 꽤 오랫동안 이 부장님과 함께 일하다 TO문제와 상부조직의 결정에 따라 나는 견적팀으로 가게 되었다. 이 부장님은 본인의 잘못이 아닌데도 내게 많이 미안해하셨다. 그렇게 나는 견적팀에서 새로운 업무를 배우게 되고 적응해 나갔다.
견적팀으로 옮긴 지 거의 1년이 다 되고 새 업무도 꽤 익숙해지던 어느 날이었다.
이 부장님께서 찾아오셨다. 같이 커피 한잔하자고 하셨다.
“잘 지내냐?“
“예.. 부장님. 업무도 많이 적응하고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렇구나…음…“
“무슨 하실 말씀 있으세요? 편하게 말씀하세요.“
“기술파트에 새 티오가 났다. 다시 같이 일할래?“
“아…그래요?…근데 저 그렇게 혼내시더니…저 말고 똑똑한 사람 뽑으시지 그러세요?“
“설계사 다녀보니까 너 찾는 사람들이 많더라. 참 잘 도와줬는데 아쉽다고 하면서 말이야…”
“부장님…꽃이 지고 나서야… 봄이었음을… 드디어 알게 되신 건가요?“
“험…험...뭐 그렇다고 하자…어떡할래?“
당시 견적팀의 업무도 나에게 잘 맞는 것 같아 계속 견적팀에 있고 싶다는 것이 내 솔직한 마음이었다. 하지만…이 부장님이 어떤 분인가? 내가 나 자신에 대해 절망하고 회사를 그만두려 했을 때 손을 내민 분이다. 내가 어떻게 그 은혜를 잊고 나만 편하자고 할까? 그럴 순 없었다.
“부장님 하나만 약속해주세요. 이젠 저 좀 적당히 혼내시죠…그것만 약속하시면 갈게요.“
“그래…앞으로 혼내지 않을게…약속할게…“
“알겠습니다.“
나는 그렇게 다시 이 부장님과 일하게 되었다. 견적파트장님껜 진심으로 미안했다. 믿고 받아주었을 텐데 1년 만에 기존팀으로 복귀하겠다고 하니 좀 어이없으셨을 것 같다. 친정팀으로 가겠다는데 고과를 잘 줄 사람은 없다. 그해 인사고과를 바닥으로 받는 걸 감수하면서 이 부장님께 돌아갔다.
이 부장님은 딱 한 달간만 약속을 지키셨다. 한 달이 지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내가 실수하면 아주 그냥 박살을 내셨다. 그렇게 중간 1년을 빼고 9년간 같이 일하고 있다. 한 직장에서…그것도 수많은 팀이 있는 대기업에서 9년간 같이 일한다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이 부장님을 주축으로 하는 배전기술파트 업무가 회사에서 인정을 받았기에 가능했다고 본다. 물론 그것은 전적으로 이 부장님의 탁월한 능력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오랫동안 지금까지 일해왔다. 최근에는 데이터센터 프로젝트 기술 지원을 많이 하는데, 설계사와 고객 측에서 요구하는 기술적 사항이 갈수록 고난도의 업무라 갈수록 힘들고 바쁘다.
언젠가 이 부장님과 술자리에서 이런 이야기를 나눴다.
“부장님 저희 햇수로 10년째 같이 일하고 있네요. 정말 보통 인연이 아닌 것 같네요.“
“그래…인연인지…악연(?)인지는 모르겠다만 오랫동안 같이 일했지.“
“하하 그렇죠“
11년 전 내게 손을 내밀고 잡아주셨기에 나는 계속 직장생활을 할 수 있었고, 헤어지려고 했던 여자친구와는 계속 교제하다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김세한, 김라한 내 생명보다 소중한 두 아들이 태어났다. 만약 그때 회사를 그만두었다면 지금의 내 가족은 없었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현기증이 난다.
앞으로도 배전기술파트에서 이 부장님과 계속 같이 일하는 것이 내 개인적인 바람이다.
하지만 내 바람대로 흘러가지 않을 수도 있다.
나도 안다. 회사 차원의 조직개편 등으로 언젠가는 같이 일하지 못하고 헤어질 날이 올 수도 있다. 그것이 조직이기 때문이다.
나는 크리스천인데 성경을 통해서 사람은 믿고 의지할 대상이 아니라 사랑해야 할 존재라는 것을 배웠다. 그래서 이 부장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며 존경한다.
이 부장님과 언젠가 헤어지는 날이 온다면 큰절을 하고 그동안 나에게 베푼 은혜에 감사하며 영원히 잊지 않을 것 같다. 언제가 그날이 올 때까지는 지금처럼 감사하며 같이 즐겁게 일할 것이다.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11년 전 내가 회사 그만두겠다고 징징 울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이 부족한 나를 케어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았고, 그분이 바로 이 부장님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부장님의 마음을 움직여서 내게 손을 내밀었고 난 그 손을 잡았다. 많이 부족한 나의 손을 잡고 긴 세월 동안 이끌어준 이 부장님께 감사하다.
아…오늘도 은혜로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