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는 복종하고, 인간은 선택한다.' - 앤드루 라이언
사람들은 여전히 게임이라는 매체를 오락거리 정도로만 치부한다. 그러나 게임은 그 어떤 매체보다도 종합예술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발전된 CG를 통해 시각효과를, 게임 내의 스토리라인을 통해 문학성을 가진다. 여기까지는 영화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지만, 게임은 다른 점이 있다. 바로 플레이어의 참여와 선택을 통해 이야기가 전개된다는 점이다. 물론 선택 분기가 없는 게임들도 많지만, 어찌되었건 게이머가 직접 게임 내에서 행위를 함에 따라 이야기가 진행된다. 관객이 수동적으로 이끌려다니는 영화와 결정적인 차이점이다.
'바이오쇼크'는 거의 처음으로 '종합예술로서 게임'의 가능성을 제시한 게임이다. 당대 수준을 넘어서는 그래픽, 1930년대 미국의 아르데코 디자인에 감성에 SF, 혹은 디젤펑크를 더한 매력적인 건물과 사물의 디자인, 거기에 충격적인 스토리라인과 스토리텔링까지.
이 게임의 배경 스토리는 이렇다. 러시아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자본가 '앤드루 라이언'은 인간의 자유를 부정하는 러시아의 공산주의에, 그리고 노력하지 않는 자들에게 복지를 제공하는 미국의 뉴딜 정책에 실망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자본을 동원해 진정한 자유인들의 도시, 해저도시 랩처를 세운다. 랩처에는 기부를 강요하는 종교인도, 과학자와 예술가를 방해하는 도덕적 잣대도 없다. 오직 자유로운 인간만이 있을 뿐이다. 그는 자유만이 악을 제거하고 선순환을 낳을 수 있다고 믿었다. '보이지 않는 손' 과도 유사한 이 사상을 라이언은 스스로 '위대한 사슬'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라이언의 이상과 랩처는 프랭크 폰테인이라는 사업가에 의해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폰테인은 라이언이 금지한 지상과의 밀수를 통해 마약, 종교적 상징물, 영화 등을 들여와 랩처 시민들을 현혹해 큰 돈을 끌어모았다.
그는 더 큰 돈을 끌어모으기 위해 과학에 관심을 기울였다. 폰테인은 브리짓 테넨바움이라는 과학자가 발견한 '아담'이라는 물질을 랩처에 유통시키기 시작한다. 바다 민달팽이에게서 처음 발견된 아담은 정상적인 인간의 세포 일부를 줄기세포로 변형시켜 각종 초능력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물질이었다. 폰테인은 이 아담으로 각종 신체 강화제를 만든다.
그러나 아담에는 결정적인 문제가 있었다. 아담을 사용한 인간은 강한 중독현상을 보이며, 정신과 육체의 일부가 무너지며 좀비화해버리는 것이었다. 물론 폰테인은 그런 것에 신경쓸 인간이 아니었다. 그는 폰테인 미래회사를 세워 과학자들을 동원해 더 많은 강화제, 그리고 플라스미드라고 불리는 초능력제를 만들게 했고 결국 수 많은 랩처 시민들이 '스플라이서'라 불리는 좀비로 변해버린다.
폰테인은 아담을 채취할 바다 민달팽이가 부족하다는 문제를 발견하고, 리틀 시스터 고아원을 설립해 고아 소녀들을 아담의 숙주로 만드는 짓까지 자행한다. 라이언은 폰테인의 행각을 더 두고볼 수 없다고 판단, 폰테인 미래회사를 기습 공격한다. 랩처를 세웠던 자신의 신념, 자유를 부정하면서까지 말이다. 결국 폰테인은 사망하고 자유로운 도시 랩처는 독재자 라이언의 랩처로 바뀌게 된다. 한편, 랩처 상공에서는 한 대의 비행기가 해이재킹 당해서 추락한다. 유일한 생존자인 '잭'은 해저로 통하는 등대를 발견하고 디스토피아가 되어 버린 랩처로 향한다. 게임은 여기서 시작된다.
바이오쇼크의 백미는 스토리텔링이다. 어째서 주인공은 홀로 운 좋게 비행기 폭발에서 살아나 해저도시 랩처로 향했으며, 왜 죽어도 계속 되살아나는 것일까? '주인공이니까.' 다른 게임들은 그렇게 말해 왔다. 하지만 바이오쇼크는 그렇지 않다. 주인공이 되살아나는 이유, '아틀라스'라는 조언자가 주인공을 돕는 이유, 그 모든 것들이 충격적인 반전과 함께 게임의 종반부에 드러난다.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 결말이 변하는 점 역시 눈여겨 볼 만하다. 더 많은 초능력과 기술을 사용하기 위해서 리틀 시스터들에게 아담을 채취했는가, 아니면 리틀 시스터를 구원해 인간 소녀로 돌려놓았는가에 따라 엔딩이 변화한다.
바이오쇼크는 게임이 어떤 스토리텔링을 가져야하는가에 대한 모범 답안이다. 게임의 이야기 전달은 분명 영화와도, 그리고 소설과도 달라야 한다. 게임은 근본적으로 게이머의 체험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바이오쇼크를 하다 보면 각 지역마다 주요 인물들의 음성일지를 발견할 수 있다. 물론 게임의 주 스토리와 무관하기 때문에 음성일지를 듣지 않고 지나쳐도 게임을 이해하는 데는 큰 문제는 없다. 하지만 게임의 각종 설정들, 뒷 이야기를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영화로 따지면 일종의 미장센이라고도 할 수 있다. 주 이야기를 전개하는 데 힘을 쏟아야하는 영화와 달리 게임은 직접 게이머가 행동하기 때문에 이런 음성일지를 통한 스토리텔링이 가능한 것이다.
바이오쇼크는 이제 10년 전 게임이다. 하지만 여전히 훌륭하고 위대한 게임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셰익스피어의 희곡들,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들이 여전히 읽히고 '시민 케인', '스페이스 오디세이'와 같은 영화가 칭송받는 것과 같이 말이다. 바이오쇼크는 게임계가 사라질 때까지 회자될 몇 안되는 게임임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