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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ure Jun 26. 2017

 오랜만에 다시 꺼내본 곡성

그 무서움에 대해

곡성 포스터

여러가지 면에서 무서운 영화다. 영화 자체만이 아니라 영화가 말하고 있는 메시지마저 그렇다.


나홍진 감독의 영화를 본 것은 곡성이 처음이다. 황해를 티비에서 얼핏, 그것도 결말만 본 적이 있긴 하지만 무슨 내용인지는 전혀 몰랐다. 나는 얼마전까지는 나홍진 감독을 그저 추격자, 황해와 같은 스릴러를 잘 찍는 감독 정도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곡성을 보고 난 뒤에는 전혀 생각이 달라졌다. 


영화를 보고 곡성이 이야기하고자 한 것은 두 가지라고 생각된다. 먼저 첫번째는 속담 하나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다.'

무명 역 천우희 분
외지인 역 쿠니무라 준 분


영화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초월적인 존재가 둘 나온다. 한 명은 외지인, 다른 한 명은 무명(천우희)이다. 사실 곡성의 전체 이야기는 이 둘의 힘겨루기에 지나지 않는다. 주인공인 종구는 시종일관 당하기만 한다.


우리는 간혹 생각한다. 신이 존재한다면 왜 못돼쳐먹고 간교한 자들은 승승장구하고 선량한 자들은 죽고 희생당하는가? 종구와 가족, 그리고 곡성 주민들은 전형적인 평범한 시민들이다. 배후에서 악한 짓을 해서 천벌을 받은 것도 아니고 그냥, 아무런 이유 없이 그냥 당했다. 영화에서 일광은 종구에게 '낚시꾼이 어디 어떤 물고기가 낚일 줄 알고 미끼를 던지냐.'라고 말한다.


나홍진 감독은 인터뷰에서 황해를 촬영 후 가까운 사람이 죽었고, 그에 대한 이유를 찾기 위해 곡성을 만들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곡성은 선량한 시민이 희생당할 때, 신은 어째서 그것을 방관하는가에 대한 그의 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신은 언제나 개인들을 위해서 일해주지 않는다. 국가 역시 마찬가지다. 이런 거대한 개념, 혹은 레비아탄들 아래에서 개인들은 손 쓸 방도도 없이 고통받고 죽어간다.


현대, 그리고 미래에는 국가와 신(종교) 이외에도 거대한 괴물들이 더욱 늘어날 것이다. 기업, 정부, 종교, 단체 등등.... 시간이 갈 수록 개인의 힘은 더 약해지고 절대적인 존재들은 점점 늘어간다. sf 소설에서 보던 세계정부, 거대기업이 점점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그 사이에서 우리들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우리는 1984의 주인공처럼, 그리고 종구처럼 죽어갈 수 밖에 없다. 이런 의미에서 곡성은, 힘을 상실한 개인에 대한 장송곡일지도 모른다.


두번째 테마는 무지에 대한 경계이다. 영화 첫장면에, 외지인이 낚시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시쳇말로 사람을 속이는 일을 '낚는다'고 한다. 외지인은 종구를, 곡성 마을을, 그리고 관객인 우리들마저 낚는다.


영화를 보다보면, 감독이 종구와 관객들을 조롱한다는 느낌도 든다. 무명의 입을 통해 외지인은 위험하다는 경고를 주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외지인이 선한 존재라는 암시도 남긴다. 종구는 결국 무명의 말을 무시하고 외지인의 하수인인 일광의 말에 따른다. 그리고 무명은 쓸쓸히 쪼그려 앉아있다.

전효진 역 김환희 분

그 유명한 대사인 '뭣이 중한 줄도 모르면서'를 생각해보자. 나는 이 대사가 딱히 영화 내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닌 대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것은 우리를, 사회를 향한 일갈이다. 사람들은 무엇이 중요한 지 모른다. 질병의 원인도 규명하지 못하고, 외지인이 선한지 악한지도 알지 못한다. 처음부터 무명이라는 존재가 일러 줬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우리는 무엇이 옳은 지 모른다. 정부가 하는 일이 옳은지, 그에 반대하는 것이 옳은지, 팔짱끼고 구경하는 것이 옳은지 알지 못한다. 곡성은 그 무지가 어떤 결과를 불러올 수 있는지 섬뜩하게 제시한다. 감독은 영화의 결말을 통해 우리에게 말한다. 네 딸이, 네 가족이 당하고 나서 움직이면, 그 때는 이미 늦었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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