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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ure Feb 21. 2020

시저는 죽어야 한다(2012)

극장, 배우들은 셰익스피어의 희곡 '줄리어스 시저'의 마지막 장면을 연기하고 있다. 브루투스가 자결하는 것으로 연극이 끝나고 시저, 카시우스, 브루투스 배역을 맡은 배우를 중심으로 관객에 인사를 보내고 막이 내려간다. 그리고 배우들, 원래는 죄수였던 그들은 다시 감옥으로 돌아간다.


<시저는 죽어야 한다>는, 죄수들이 무대 위에서 연극을 펼치는 것이 아닌 그 연극을 준비하는 과정에 초점을 두고 있다. 연극 무대 위에서 하는 연기가 아니라, 교도소에서 하는 리허설 연기가 이 영화의 중심인 것이다.


죄수 차림으로 자유를 외치는 브루투스, 연기를 하다 갑자기 감옥 생활에 대한 진심이 나오는 시저, 민머리와 죄수복 차림을 한 로마 시민들, 먼 발치에서 그들의 연기를 지켜보는 교도관들. 그 모든 것들이 영화의 편집과 혼합되어 역설적인 화학작용을 자아낸다.

연설을 하는 브루투스

이 영화의 백미는 단연 시저가 암살당하는 장면부터, 브루투스와 안토니우스가 로마 시민(죄수)들 앞에서 하는 장면의 리허설이라 할 수 있겠다. 브루투스는 그들 앞에서 자유와 조국을 말하고, 안토니우스는 규율과 시저를 말한다. 시민들은 브루투스의 말을 듣고는 그가 옳다고 하지만, 곧 안토니우스의 연설을 듣고 브루투스와 일당을 반역자라고 한다.


뒤르켐이 제시한 개념으로, 아노미라는 것이 있다. 사회의 급격한 변화나 동요로 인해 개인이 행동에 대한 규범을 상실한 상태, 즉 무규범 상태다. 도시가 커지고, 산업이 분업할수록 아노미는 더 많이 일어난다. 거대한 것이 부분으로 쪼개지면서 소외되는 계층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영화의 죄수들은 신념을 가지지 않은 자들이다. 그들은 아노미, 혼란한 상태다. 그렇기에 범죄를 저질렀고, 그렇기에 브루투스와 안토니우스 양 쪽 모두의 말에 선동당하는 것이다.

필리피 전투에 참여한 브루투스파

하지만 이 연극에 참여한 배우들은 어떤가? 그들은 감옥에서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연기하면서, 시저의 갈리아 전기를 읽으면서 무언가를 느낀다. 그것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회한, 슬픔, 감동, 기쁨, 아마 우리가 아름다운 것을 보거나 예술을 접할 때 느낌과 비슷할 것이다.


카시우스 배역을 맡은 죄수의 말, "예술을 알고나니, 이 작은 방이 감옥이 되었구나!" 그것은 배우들의 어떤 깨달음을 상징한다. 연극을 하기 전까지는 그저 천장만 바라보며 멍하니 지냈던 방이, 이제 그들에게는 감옥으로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슬픈 말이기도 하지만 다른 면으로 보면 삶에 대한 동력을 찾았다는 의미다.


여태껏 죄수라는 대상에 대해 주절주절 말했지만, <시저는 죽어야 한다>가 죄수에게만 적용되는 영화는 아니다. 우리는 삶에서 혼란을 느낀다. 특히 과거의 인간보다 현대인은 더더욱 그렇다. 그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일 수도, 정치적, 학문적, 사회적, 철학적인 이유일 수도 있다. 그때 우리는 로마의 시민이 되어서는 안 된다. 설령 실패할지라도, 우리는 브루투스나 시저 같은 인간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앞으로 걸어나갈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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