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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나딘 Jul 30. 2020

[영화] 프라이멀 피어(Primal Fear)

공포의 근원

에드워드 노튼(Edward Norton)은 영화에 등장할 때마다 같은 인물인지 의심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배우입니다. <프라이멀 피어>의 그레고리 호블릿(Gregory Hoblit) 감독은 당시 노튼이 연기했던 애런이라는 배역에 타 유명 배우를 생각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가 고사하면서 배역을 오디션으로 돌렸고, 당시 2000:1의 경쟁률을 뚫고 에드워드 노튼은 데뷔합니다.

오늘은 바로 노튼의 첫 영화 <프라이멀 피어>의 한 장면과 연관된 작품을 얘기하려 합니다. 반전 영화이지만 너무 오래된 영화인지라 내용을 공개해도 괜찮겠지요?

영화를 심하게 축약하면 전직 검사였던 변호사 마틴 베일(리처드 기어)이 대주교 살인 혐의로 기소된 애런이라는 소년의 무죄를 증명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변호사로서의 베일은 용의자인 애런을 무조건 신뢰합니다. 심지어 애런은 대주교의 욕망에 의해 정신과 육체가 유린당한 ‘보이 스카우트’ 같은 연민을 자극하는 캐릭터입니다. 이런 그를 변호사 뿐 아니라 영화 밖 사람들까지 믿게 되는 것이 이 영화의 함정이기도 하지요.

애런의 무죄 판결 이후의 소름 끼치는 반전을 보여주는 <프라이멀 피어>는 시카고라는 대도시를 바탕으로 두고 있습니다. 전체적인 이야기는 대립되는 두 가지를 제시하면서 감상자들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로마 가톨릭 대주교와 오랜 지인인 검사장은 종교를 중심으로 성인과 속세의 죄인으로 나뉘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이면에는 재단 이권을 위한 두 세계 권력자의 담합이 있었습니다. 대주교의 음란한 욕구와 그의 지시에 따르는 소년, 검사장과 출세를 원하는 검사는 일반적인 수직 관계를 대변합니다. 성인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소년을 벌하고자 사회 전체는 하나로 뜻을 모으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사회와 그곳으로부터 철저하게 배제된 개인의 대립이 두드러집니다. 또한 애런은 자신의 내부에서조차 소심하고 내성적인 인물과 공격적 성향의 로이가 공존하는 해리장애를 겪는 정신이상자로 연민과 두려움을 동시에 일으키는 인물입니다. 이 구도는 기본적인 현대 사회 구조에서 나타나는 현상과 그것의 어두운 이면을 동시에 보여주면서 감상자에게 신뢰의 근본을 의심하게 만듭니다. 그 시작은 변호사와 의뢰인 사이의 무조건적인 신뢰에서 비롯되어 사회 전체로 확장됩니다.


프라이멀(primal)은 ‘근본적인’ 혹은 ‘원초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영화 제목에서 알려주는 근원적 공포는 바로 이 신뢰에 균열이 자아내는 불안과 두려움을 말하는 듯합니다. 영화 속 변호사 사무실 벽면에 보이는 까이유보트(Gustave Caillebotte)의 작품이 도심 속 사회 구성원의 대립과 도시 변화가 야기하는 균열을 대변하는 것 같습니다.

영화 속 마틴 베일의 사무실에는 까이유보트의 <비 오는 날 파리의 거리>(1877)가 어지러운 책상 뒤 흰 벽면에 걸려 있습니다. 까이유보트는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입니다. 타 인상주의 작가들과 달리 사실주의를 기반으로 작품을 제작했습니다. 당시 산업화된 파리의 일상 현실을 직접적으로 표현했기에 그의 작품을 통해 많은 정보를 엿볼 수 있습니다. 


까이유보트, <비 오는 파리의 거리>, 1877, 캔버스에 유채.

그는 1876년부터 1877년에 걸쳐 파리의 거리 장면을 시리즈로 그렸습니다. 실내 장면을 그린 <창가의 젊은 남자>(1876), <발코니 위의 남자. 오스만대로>(1880)와 달리 <유럽의 다리>(1876), <비 오는 날 파리의 거리>는 외부의 파리 시내를 담고 있습니다.

까이유보트의 <창가의 젊은 남자>와 <발코니 위의 남자. 오스만대로>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 <안개바다를 바라보는 방랑자>, 1818, 캔버스에 유채.

실내에서 외부를 바라보는 그림 속 주인공의 뒷모습은 프리드리히의 <안개바다를 바라보는 방랑자>(1818)에서 드러낸 숭고미와 유사함을 보입니다. 다만 프리드리히의 작품이 자연에서의 숭고함을 찾았다면, 까이유보트의 경우에는 근대 산업화된 도시사회 속에서 숭고함을 찾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의 작품에는 근대화된 파리의 모습이 곳곳에 담겨 도시사회의 여러 모티브를 찾을 수 있습니다.


파리의 제2제정기 당시 오스망이 벌였던 파리 재건축 사업에서 새로운 건축구조로 등장한 발코니가 그 대표적인 이미지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대로와 강을 잇는 다리 역시 파리 재건 사업에 따른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까이유보트는 사적인 공간뿐 아니라 공적인 공간에서조차도 산업사회로의 전환과 그에 따른 소비문화와 스펙터클을 제시하면서 자본에 의해 분리되는 새로운 계급사회를 보여줍니다. 전면의 커플 뒤로 보이는 우산도 없이 사다리를 들고 흰색 상의를 입은 남자와 이제 막 상점에서 나오는 흰색 두건과 앞치마를 두른 여성의 이미지는 차려입은 인물들과 대비되어 소비사회에서의 계급 차이를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근대 소비문화와 관련된 이미지는 작품 곳곳에 등장합니다. 파리의 잘 다져진 대로와 건물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 속 인물들은 유사한 패션에 유사한 우산을 들고 있습니다. 전경의 두 커플은 동일한 곳을 바라보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건너편의 쇼윈도를 보는 것 같습니다. 길거리 상점의 간판이나 쇼윈도 등은 까이유보트의 관심사이기도 했습니다. 이 두 가지는 소비사회의 스펙터클을 양산하는 주요한 요소이기도 합니다. 작품 속 커플의 시선은 소비욕구를 자극해서 사람들을 거리로 나오게 만들고 공적 공간이 곧 개인의 욕구를 실천하는 장소이면서 동시에 타인의 응시를 통해 존재감을 느끼는 개인적 욕구 충족의 장소로서의 쇼윈도를 응축해서 보여주는 시선인 것입니다. 또한 그 시선은 대량 유통 방식이 만들어낸 당시 소비문화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유사한 상품에 대한 소유 충동과 그에 따른 사회적 소속감과 집단의식을 대변하면서 이에 반하는 개인을 배제하는 기능을 보여줍니다. 작품 중앙의 바닥을 보며 걷는 남자는 다른 이들과 달리 쇼윈도에 시선을 돌리거나 일행과 함께 걷지 않고 홀로 바닥을 보며 걷는 모습에 보는 이들로 하여금 불안을 야기합니다.

영화 속 애런이 사회로부터 배제되는 현상 및 여타 대립구조들의 등장과 연결해서 생각을 해본다면 변호사 사무실의 이 작품 배치는 시카고라는 대도시와 그것이 만들어낸 문화, 그리고 사회 구성원과 배제되는 인물 등으로 보아 매우 적절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영화와 까이유보트의 작품을 연결해서 전체를 다시 정리하면서 영화 제목이 내포하는 의미를 좀 더 고심해보겠습니다. 까이유보트의 그림은 근대 도시 속 부르주아 및 부르주아적 삶의 이미지를 닮고자 하는 소비 욕구를 바탕으로 상점과 거리 등 자본을 바탕으로 조성되는 곳 사회를 표현했습니다. 근대 산업사회의 대표 도시인 파리를 담은 작품과 미국 시카고라는 도시 공간 속 변호사 사무실은 상품의 소비 및 사건 의뢰와 같은 일종의 소비를 야기한다는 점에서 교차합니다.


근대 소비문화는 가문이 아닌 자본을 근간으로 하는 계급을 굳건히 다졌습니다. 이로써 현대 사회에서 인간의 신뢰 조건은 바로 ‘돈’이 됩니다. 무보수로 변론을 해주면서 개인적 이득이 아닌 사회로의 환원을 약속하는 듯 보이는 마틴 베일 역시 이 사건의 해결이 곧 자신의 실력 증명과 명성으로 이어지는 점을 알고 있었지요. 이는 곧 다른 돈벌이 건수로 이어집니다. 즉 변호사와 의뢰인 사이의 신뢰는 의무조항 이전에 돈으로 체결된 거래를 바탕으로 한다는 점을 꼬집습니다.

영화 역시 인간 본성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보다는 신뢰에 대한 조건이 사회 구성이나 인간의 존재를 규명하는 데 바탕을 두는 것이 아니라 자본과 명성에 의지하고 있다는 점을 노출시킵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사는 사회라는 점을 강조하지요. 또한 각 사회 구성원 사이의 믿음과 신뢰가 가면에 속아 생긴 것일 수 있다는 점을 강하게 제시하면서 영화는 우리의 모든 신뢰의 뿌리에 크랙(crack)을 가합니다. 그것이 바로 원초적이고 근본적인 공포라 말하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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