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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나딘 Aug 26. 2020

<The Illusionist>

illusion, trompe-l’oeil

'illusion'은 특정 상황에 대한 착각이나 오해, 환영, 환상을 의미합니다. 인간은 시간과 공간을 벗어날 수 없음과 동시에 시각과 청각에 매우 의존적인 동물입니다. 때문에 고대 그리스에서 아름다움(美)을 논할 때 인간의 감각미 중에서 시각과 청각에 대한 부분만을 논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당시 궁극적인 아름다움은 윤리에 관한 것이었고 이는 곧 지성(이성)에 따른 것이기는 했습니다.


시각에 의해 주체와 대상의 존재와 현상을 파악하는 인간의 한계는 예술 분야에서 오히려 효과적인 방식으로 작용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기묘한 솜씨로 의도적으로 시각적 착각을 야기하는 일루셔니스트는 비록 눈속임이지만 우리에게 환상적인 마술의 세계를 보여줍니다.

오늘은 영혼의 마술사 아이젠하임을 다룬 영화와 미술에서 환영의 극을 보여주는 눈속임 미술인 트롱프뢰유(trompe-l’oeil)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영화 <일루셔니스트> 일부 장면


<일루셔니스트>는 2006년 닐 버거(Neil Burger) 감독이 스티븐 밀하우저의 소설 「마술사 아이젠하임 Eisenheim The Illusionist」을 원작으로 한 영화입니다. 일전에 소개드렸던 <프라이멀 피어>에서 명풍 연기를 보여준 에드워드 노튼(Edward Norton)이 바로 영화 속 일루셔니스트로 등장합니다.

영화는 19세기 말 오스트리아 빈을 배경으로 합니다. 그러나 실제 촬영지는 체코라고 하네요.

(촬영 장소에 대한 이야기는 2007년 『신동아』의 「‘일루셔니스트’의 환상, 체코 체스키크룸로프: 마법의 거리, 거리의 마법」를 참조하세요.)

아이젠하임은 주관적인 시간의 느낌을 물체가 중력에 의해 떨어지는 속도를 조절하며 가시적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또한 오렌지에서 씨를 빼고 화분에 심어 물리적 시간을 특정 공간에서 빠르게 흐르도록 만들기도 합니다. 그가 “내가 풀지 못한 유일한 미스터리는 네가 없는데도 내 심장은 뛰고 있다는 거였어.”라고 말하는 장면은 제 심장마저 뛰게 합니다. 그런데 그가 볼 수 없는데도 마치 눈앞에 있는 듯 설렌다는 점이 아이젠하임이 유일하게 알아내지 못한 미스터리라는 점은 일루셔니스트가 얼마나 시각에 집중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영화는 빠르게 전개되면서도 권력과 사랑, 환상과 사기 등 다양한 관점에서 이야기를 조명할 수 있는 매력이 있습니다. 제게는 ‘일루전’에 대해 재고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는데요. 이유는 회화라고 하는 것이 현대 이전에는 환영을 만드는 데에 치중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모더니즘 이후에는 오히려 의도적으로 눈속임을 위한 회화가 제작되기도 했습니다.

회화에서의 일루전, 즉 환영에 대해 매우 간략하게 일축해 보겠습니다.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시는 제욱시스와 파라시오스와의 그림 대결이 가장 대표적인 사실적 묘사에 따른 환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신라시대 황룡사벽에 솔거가 그린 소나무 일화를 들 수 있겠네요. 이쯤 되면 느낌으로 아셨겠지요? 환영은 바로 종이라는 2차원의 평면에 3차원의 공간을 재현해내는 것을 말합니다. 르네상스 시대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성당에 그린 프레스코 벽화도 좋은 사례가 되겠습니다. 수많은 작가들은 평면에 건축적 입체감을 불어넣기 위해 고심했었습니다. 모더니즘 이후 회화는 평면 그 자체라는 점에 천착하게 되었고, 이후 작가의 표현 과정을 그대로 담은 액션 페인팅(Action Painting)이나 평면에 단일 색만을 칠하는 색면화(Color field Painting) 또는 캔버스의 사각형 그리드(grid)를 벗어나려는 노력 등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졌습니다. 동시에 기존에 사실적인 재현을 넘어 의도적인 눈속임을 꾀하려는 회화도 꾸준히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Michelangelo, Sistine Chapel ceiling, 1508~1512. (보이는 것과 달리 실제 성당의 천정은 평면입니다.)

트롱프뢰유는 회화를 넘어 도로나 건물의 미디어 파사드에 활용되기도 했습니다. 미디어 파사드는 건물 외벽을 대형 스크린처럼 활용해 공간을 시각적으로 왜곡 또는 확장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단순히 전광판을 이용하던 1900년대 초반의 기술을 넘어 현재에는 건물 외벽에 가상공간을 만들거나 미디어 아티스트들과 협업하고, 감상자와 상호작용이 가능한 인터랙티브 아트까지 확장되었다고 합니다.

2016년 마이애미의 몬드리안 사우스비치 호텔에서는 이 같은 미디어파사드의 확장 형태로 옥상 수영장에 250,000개의 탁구공을 띄워 스크린을 대체한 후 상공에서 프로젝트를 쏘아 프로젝션 맵핑을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Ping Pong Pool Projection>, 2016.
Trompe l'oeil in fashion, HERMÈS PARIS SS 1952.

패션에서도 적극적으로 눈속임은 적극적으로 활용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명칭의 고가 브랜드뿐 아니라 최근에는 예능 프로그램에서 마치 근육맨과 같은 몸매를 자랑하는 셔츠를 입고 나오는 연예인들의 재미있는 의상에서도 같은 예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또한 달콤함에 시각적 재미도 선사하는 트롱프뢰유 디저트도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프랑스 요리 경연대회인 'Top Chef'에서는 우리나라 이은지 셰프가 콧대 높은 프랑스 요리사들을 보기 좋게 속이기도 했습니다.

프랑스 요리 경연 프로그램 'Top Chef' - 일부 이미지 출처: 네이버 블로그 '오늘의 유레카 by 김오뚝'

회화나 패션, 미디어아트에서 나아가 조형예술에서도 그 사례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실비아 하이먼(Silvia Hyman)은 도자기로 책, 가방, 상자 등을 만드는데요. 그 작품이 도자기로 믿을 수 없을 만큼 표현 대상의 재질이나 색을 디테일하게 살려냅니다.

Sylvia Hyman, <Bookmobile>, 2008. / <Spilled Packages>, 2002.

거리의 예술가로 알려진 일러스트레이터 커트 웬너((Kurt Wenner)는 길 위에 초크로 대형 그림을 그립니다. 길을 걷다 구덩이로 빠질 것 같은 느낌을 자아내는 그의 작품은 주변 환경과 섞이면서 독특한 경험을 선사하는 속임수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마도 누군가에게 사기를 당했다면 유쾌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트롱프뢰유나 마술 역시 타인을 속이기 위한 의도에서 시작된 일종의 사기입니다. 그럼에도 그 결과는 인간의 한계를 깨닫게 하지요. 때문에 의도적 사기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눈속임은 내가 보고 믿는 모든 것들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게 하는 교훈을 남깁니다.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 보이지 않다고 해서 그것을 부정할 수는 없겠지요. 이 점은 영화 <일루셔니스트>를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감각에 의존적인 동물이 인간이지만 고대부터 인간의 가장 큰 무기는 지성과 이성이었습니다. 수천 년이 흐른 지금, 환상과 환영 그리고 사기를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시각일까요? 혹은 이성적 판단일까요?

Kurt Wenner Exhibition at Cipuatra Artpreneur, 2013, Jakarta, Indone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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