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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나딘 Sep 09. 2020

정희우, 도시의 표상을 수집하다.

을지로의 장인들

명절이 다가오는 9월입니다. 코로나 19 바이러스와 연타로 날아온 태풍으로 인해 명절의 기분보다는 걱정이 앞서는 요즘입니다. 그럼에도 온라인 뉴스 곳곳에서는 추석 명절에 대한 준비를 부추기는 소식들이 보이네요. 가장 눈에 들어오는 뉴스는 개인적 취향 때문인지 전통주와 관련된 기사였습니다.

GS25는 전통주 소비 활성화를 위해 애플리케이션 ‘더팝’을 선보였다고 하네요. 이는 소비가 침체된 전통주 제조사를 위해 농림축산식품부와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와 함께 ‘우리 술 담다’라는 캠페인의 일환으로 추진되었으며, 스마트 오더 방식은 GS25가 유일하다고 합니다.

술은 함께 곁들이는 음식뿐 아니라 마시는 잔을 통해 시각적으로 먼저 즐길 수 있지요. 각각의 주류가 지닌 아로마를 보다 풍부하게 느낄 수 있도록 그 술잔 역시 다양한 형태를 갖추고 있습니다. 

한국의 전통주를 위한 현대적인 디자인을 선보이기 위해 핀란드, 노르웨이에서 온 디자이너가 협심을 했습니다. 아몬드 스튜디오는 밀라와 알랜, 그리고 조수아 세 명의 디자이너가 한국의 전통주를 위한 테이블 웨어를 제작하기 위해 모인 팀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서울의 다양한 재료와 제조의 기회를 활용하여 일상을 보다 가치 있고 독창적으로 디자인하는 데 뜻을 두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몬드 스튜디오의 디자이너들은 80년대 한국의 제조업 전성기를 누렸으나 지금은 재개발로 인해 철거의 대상인 된 을지로 제조업체를 중심으로 제품을 생산합니다. ‘술라’는 30년째 제조업 공장 ‘삼성시보리’를 운영하신 박춘삼 사장님과 젊은 디자이너들이 합작해서 만들어낸 전통주잔입니다.

'술라' 제작 과정 (이미지 출처: 텀블벅.com)

구리와 황동 금속 판재를 이용해 시보리 과정을 거친 후 완성된 잔은 성질에 있어서 항균뿐 아니라 찬 음료를 마실 때 가장 효과적이라고 합니다. 대형 공장을 통해 대량생산에 나서려면 제작 과정뿐 아니라 재료를 구하는 과정에서 디자인을 샘플을 제작하는 기간도 엄청나게 길다고 합니다. 그러나 을지로는 그 지역의 특성으로 인해 하루면 샘플을 제작할 수 있다고 하네요. 게다가 기본 30~40년의 경력을 지닌 사장님들은 골목 하나를 두고 서로의 전공 분야를 잘 알뿐만 아니라 재료를 구할 수 있는 곳까지 다 파악하고 계시다고 합니다. 장인과 같은 사장님들과 젊은 감각을 지닌 디자이너가 협심을 하면 그 시너지는 가히 상상을 할 수 없을 정도이니 을지로 같은 곳은 재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밀어버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울의 성장과 동력을 지녔으며 동시대 삶의 다양함을 위한 디자인 제품을 위해 보호해야 하는 곳이 아닐까요? 오래도록 한 우물만 팠던 장인들의 솜씨를 전수받을 수 있는 곳으로도 손색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현재 이 곳은 대부분의 제조업 장인들이 재개발로 인해 떠밀려 나가고 있는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도시의 개발로 인해 과거 ‘서울’, ‘강남’이라는 도시의 표상이었던 것들 하나씩 제거되고 그 흔적은 오롯이 기억으로만 남게 되는 현상은 화려해질 미래에 대한 기대보다는 과거의 추억이 소거된 것에 대한 탄식만 남깁니다. 과거 속으로 사라진 도심의 흔적에 안타까움을 느껴 작품으로 그 표식들을 수집하는 작가가 있습니다. 바로 정희우 작가입니다.

최근 국립현대미술관의 판화전에서도 정희우 작가의 작품을 볼 수 있었습니다.



(좌) 국립현대미술관 <판화, 판화, 판화> 전시 전경, (우) 정희우, <성수동 일요일>, 2018, 종이에 탁본.

그는 강남뿐 아니라 여의도, 이촌동의 오래된 아파트 담장을 탁본으로 떠 그 흔적을 수집했습니다. 또한 종로 1가에서 6가까지 나무 간판을 찾아 탁본으로 남겼습니다. 그는 도시의 수집가, 혹은 도시를 구성하는 요소들 중에 쉽게 변화하고 사라지는 것들을 탁본으로 남기기에 도시의 표상을 선명하게 기록하는 작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익숙해진 것들에 대한 감정을 거두어내고 그것이 지닌 이야기에 집중하면 맨홀 뚜껑부터 담벼락의 벽돌에 이르기까지 사소한 많은 것들은 거대 서사를 이끌어내는 매개체가 됩니다.

(좌) 정희우, <우수>, 2012, 종이에 먹. (우)  <통신>, 2012, 종이에 먹.

도시개발, 재개발지역은 화려한 미래와 다가올 부의 축적에 대한 기대로 가득 채워진 단어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면에는 사라질 현재와 과거의 기억뿐 아니라 장인들의 일터와 오랜 삶의 터전을 파괴할 응축된 폭력이 도사리고 있는 듯합니다.

정희우 작가는 우리가 살아온 그 길을 탁본으로 남기지만 동시에 우리가 살아갈 미래에 대한 연민을 찍어내기도 하는 듯합니다. 사라진 것들에 대한 기록은 곧 그리워할 것들에 대한 준비라고 할까요? 글로 남기는 것이 망각의 동물인 인간에 대한 반증이라면, 대상을 촘촘하게 누르고 찍어 오롯이 남기는 탁본 역시 사라질 것, 또 우리가 다시 보고 싶어 할 것들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듯합니다.

정희우 작가는 종로 1가~6가까지 남아 있는 나무간판을 탁본으로 찍어 사라질 것들을 기록해 두었습니다.

볼거리로 가득한 도심 속 사라진 나무 간판이나 맨홀, 아파트 담벼락을 찍어낸 그의 탁본 작품들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안겨주네요. 곧 사라질 을지로와 그곳을 평생의 터전으로 삼아오셨던 여러 제조업 공장과 그곳을 운영해오신 장인과 같은 사장님들의 이야기를 이렇게나마 글로 기록해봅니다.

서울의 상징이 잠실의 제2롯데나 화려한 한강의 야경이 아닌 을지로와 같은 독특한 골목이 되는 날이 올까요? 우리는 언제쯤 서구식 화려한 발전이 아닌 우리의 것에 대한 소중함을 계승, 전승, 발전시키는 날을 맞이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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