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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나딘 May 10. 2021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

2차 세계대전 전장에서 소련군에게 잡힌 폴란드 장교들은 도살을 앞둔 가축이 아닌 지적 존재로 생존해 있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증명하기 위해 서로에게 강의를 해주었다고 합니다. 교수 출신의 장교는 책의 역사에 대해서 강의를 했으며, 공대 교수는 건축사 강의를 맡았습니다. 전후 미술평론가로 활동했던 유제프 차프스키는 전적으로 자신의 기억에 의존하여 프로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전했습니다. 그들은 영하의 혹독한 기온에도 야외 노역을 해야 했으며, 일과를 마치면 음식이라 부를 수 없는 것들로 배를 채웠습니다. 그럼에도 지친 몸을 이끌고도 유일하게 인간으로서 행복할 수 있는 지적 탐구의 시간을 보냈다고 합니다.  

이 시기 조선 역시 암흑기였지요. 일본의 탄압이 거세게 지속되던 시기 우리의 예술가들도 각자 자신만의 방식으로 당시의 삶에 저항했습니다. 어둠 속에서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유지하기 위해 지적인 활동을 놓지 않았던 이들의 관계에 주목한 전시가 있습니다. 바로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입니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개최되고 있는 이 전시에 대해 소개하려 합니다.      

프랑스의 예술가들이 카페에 모여 자신들의 철학을 논하고, 급변하는 주변 국가의 예술계에 대한 정보를 서로 주고받았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계시겠지요? 본 전시는 우리나라 그것도 일제 식민 치하에서의 예술가들이 서로 교우하던 관계에 주목했습니다. 일본에 전파된 서구의 문물이 당시 조선에도 유입되었습니다. 더불어 유럽의 미술사조와 개념서도 국내 학자들에게 전해졌습니다. 일본에서 유학했던 학자, 예술가들의 영향도 있었지요. 시인 이상과 화가 구본웅의 우정, 김용준과 소설가 이태준, 이여성과 김기림과의 만남이 불러온 문학과 미술계의 반향은 근대기 예술의 풍요로움으로 이어졌습니다.     

화가 구본웅이 그린 이상의 초상화(1935)

전시는 ‘전위와 융합’, ‘지상(紙上)의 미술관’, ‘이인 행각’, ‘화가의 글·그림’으로 4파트로 구성되었습니다. 제1 전시실에서는 당시 빠르게 전파되던 여러 개념과 미술사조 등 소위 ‘현대성’이라 불리는 여러 징후들을 흡수하고 제일 앞에 자신을 위치시키려 했던 예술가들을 소개합니다. 이들은 이상이 종로에서 운영했던 다방 ‘제비’에 모여 열띤 논쟁을 했다고 합니다. 다양한 생각과 너무나 다른 문화와 다른 장르의 예술인들이 모인 장소에서의 토론이 어떠했을지 상상하게 됩니다. 초현실주의, 다다와 추상회화와 같이 기존에 있던 조선의 문학이나 회화와는 전혀 다른 것들에 대한 지식이 오고 갔을 것입니다.     

(좌) 1930.12. 23. 김용준, [백만양화회를 만들고] (우)1931. 8.7. 김기림, [현대시의 전망] / 이 둘 모두 초현실주의에 대해 글을 다루고 있다.  

개인적으로 너무 힘들었던 제2 전시실은 종이 위에서의 미술에 대해 펼쳤습니다. 당시 책이나 신문에 기고된 소설이나 시는 늘 삽화가 따랐습니다. 김소월의 『진달래꽃』,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비롯한 인쇄 미술을 다룹니다. 

우리가 익히 알던 문학가들의 소설이나 시를 제외하고도 신문에 실린 소설과 삽화도 전시의 주요 부분을 차지합니다. 당시 신문 소설은 신문의 발행부수를 좌우하는 최대 요인이어서 신문 삽화는 당대 최고의 미술인들로 섭외되었습니다. 한국회화사 수업시간에 익숙하게 들었을 이상범과 노수현의 작품도 만날 수 있습니다. 또 정현웅과 김규택, 이승만과 안석주와 같은 유명한 화가들의 삽화를 볼 수 있습니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제 2전시실 전경

네이버의 ‘뉴스 라이브러리’에서는 동아일보, 조선일보와 경향일보 등 옛날 신문을 볼 수 있는데요. 당시 신문소설을 찾아 읽기에는 매우 편리합니다. 전시에서 다 보시지 못한 분들은 뉴스 라이브러리를 이용하시면 좀 더 편하실 거예요. 삽화도 확대해서 보실 수 있습니다.      


3 전시실에서는 문학가와 화가의 특별한 관계에 집중한 것 같아요. 그리고 마지막 4 전시실은 화가로 알려졌지만, 글 솜씨 또한 훌륭했던 작가들에 대해 다루었습니다. 2층 복도에는 작가들의 유족 인터뷰 영상이 상영되고 있었습니다. 가족들의 회상으로 인해 멀게만 느껴지던 1930~40년대 그리고 한국전쟁 당시의 상황들이 동시대와 연결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전시를 보면, 한 번에 모든 작품을 훑고 나오는 경우도 많습니다. 기획과 설치에 많은 에너지를 쏟았을지는 모르지만 전혀 전달이 되지 않는 전시도 많거든요. 또는 전시의 상업적인 의도에 분노가 치밀기도 하고요. 그런데 이번 전시는 마치 영화 <밀정>, <암살자>처럼 일본의 만행이 자행되던 당시 조선인들의 삶을 다룬 영화를 한편 보고 나온 감동이 있었습니다. 더불어 기획자가 얼마나 고생했을지 느껴지더군요. 

당대 문학과 예술은 급변한다는 단어로는 부족한 격변의 시기였습니다. 남아 있는 자료도 충분하지 않고, 또한 한국전쟁 기간에 북으로 간 학자들이 다수여서 오랜 기간 연구할 수 없었다는 한계도 있었습니다. 어둠의 시기였기에 근대기 예술에 대한 연구가 시작된 시기는 길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학자들의 집요함으로 현재는 다양한 관점에서 연구가 진행되었지요. 이번 전시는 글과 회화의 만남에 주목을 했다는 점이 매우 신선합니다. 그들의 교류가 있었다는 점은 잘 알고 있으나 이를 작품으로 펼쳐주니 관람자의 입장에서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루에 다 보기엔 무리인 것 같네요. 

전시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서둘러서 다녀오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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