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놀이, 아빠의 글쓰기
다른 바구니를 뒤지기 시작한다. 이미 테이블 위에 있던 헬로카봇 장난감은 거실 바닥에 내뒹굴고 있다. 이번엔 공룡 장난감을 꺼낼 작정인가 보다. 당연히 헬로카봇이 쳐부서야 할 악당이 필요할 테니. 하나둘 공룡 장난감을 들어올리는 작은 손을 보면서 한숨이 나온다. '저거 언제 다 치우냐!'
이번엔 블록 장난감이 한가득 담겨 있는 바구니가 타깃이 된 듯하다. 아들의 시선이 블록 장난감을 향하고 그쪽으로 몸을 이동할 때, "그만"이라고 외쳤다. 아들의 관심에서 멀어진 헬로카봇 장난감들을 테이블로 옮겨 정리하면서다. 아빠의 메시지도 명확히 전달했다. "이거는 치우고 다른 장난감 꺼내자."
아들은 아빠의 말을 분명히 들었다. 잠깐 멈칫한 아들은 다시 블록 장난감 바구니쪽으로 손을 뻗는다. 대답은 없고, 고개도 아빠를 향해 돌리지 않는다. 이번엔 경고 메시지를 보냈다. "안 치운 장난감은 아빠가 버릴 거야." 아들이 고개를 돌려 아빠를 빤히 쳐다본다. 이내 아들의 표정이 굳어진다. 물러서지 않겠다는 기세로 아들이 입을 뗐다. "그거는 그냥 거기 둬야 해."
아들의 놀이에 한계를 설정하려다 실패했다. 생각해보면 당치도 않은 제재를 가하려고 했다. 아들의 삶과 생각을 아직 흉내도 못 내는 주제에.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인간 정신의 성장을 낙타, 사자, 어린아이 세 단계로 구분했다. 낙타는 투철한 노예 정신이라고도 볼 수 있는 수동의 정신을, 사자는 주체적인 삶으로 읽힐 수 있는 부정의 정신, 마지막으로 어린아이는 '즐기는 삶'으로 이해되는 긍정의 정신이다. 아빠는 자신이 그렇게도 존경하는 철학자인 니체가 인간 정신의 가장 높은 단계로 칭했던 바로 그것을 실천 중인 아들을 막으려 했다.
아빠는 퇴사하고 글을 쓰고 있다. 읽고 쓰는 삶에 대한 동경도 물론 있지만 절실함이 크다. 절실함을 막상 실천으로 옮기니 불안하다. 돈 들어오는 일은 없고, 돈 나갈 일만 있다.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루에도 수십 번 하는 거 같다. 결국에는 읽고 쓰는 삶을 접고 돈 버는 삶에 매진해야 하는 거 아닌가, 라는 막막함이 밀려온다. 그렇지만 당장은 설렌다. 매일 읽고 쓰는 삶이 재밌다. 잠들기 전 아침이 빨리 오기를 바라는 마음까지 들 정도다. 월급을 기다리며 출근을 할 때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은유의 글쓰기 상담소>에서는 글쓰기를 아이들의 놀이에 비유했다. "유년기는 무언가를 이루겠다는 목적의식 없이 세상을 배울 수 있는 유일한 시기라고 한다. 글쓰기를 배우는 사람이야 말로 목적에 갇히지 않은 어린아이의 시간이 크나큰 자산이다. 기껏 쌓은 모래성을 파도가 부숴버려도 깔깔대고 웃으며 또 모래성을 쌓는 아이처럼 순간을 놀이로 즐기며 쓰고 또 쓰기."
아들의 장난감 놀이를 쓸모없이 집을 어질러 피기만 하는 행동으로 생각했다. 아빠의 성난 외침도 무시할 만큼 푹 빠져있던 행동인데도 쓸모 없는 일을 한다고 봤다. 만약 아들의 정신팔린 놀이가 돈이 되는 일이었다면, 솔직히 아빠의 태도는 달랐을 것이다. 아빠는 아들의 놀이를 옛말처럼 "그거 해봐야 쌀이 나오냐, 밥이 나오냐" 정도로 생각했다. 발버둥 치며 버텨온 쓸모 있는 짓들에 마침표를 찍으려고 용기를 낸 아빠인데도.
글쓰기에서 쓸모를 찾는 일만은 없기를 바라며 쓰려고 한다. 잘 될지 모르겠지만 밀고 나가려 한다. 일단은 재미가 있으니. 마거릿 애트우드는 <글쓰기에 대하여>에서 메이비스 갤런트의 <선집> 서문을 인용했다. "나는 무엇 때문에 제정신인 사람이 허구에 매달려 존재하지도 않는 사람들을 묘사하는 데 일생을 바치는지 여전히 모르겠다. 만약 그것이 글쓰기에 대해 글을 쓰는 사람들이 때로 하는 말처럼 애들 장난 같은 공상의 연장이라면 그들의 행동을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그것을, 그것만을, 오직 그것만을 간절히 소망하고, 그 일을 자전거로 알프스 산맥을 넘는 것만큼이나 이성적이라 여기는 것을 말이다."
아이들이 글쓰기 선생님이라는 생각이 종종 든다. 아들은 얼마 전 아빠는 왜 파란색에 주차를 안 하냐고 물었다. 그제야 장애인 주차공간이 파란색으로 표시돼 있는 것을 알았다. 예전에 코타키나발루에서 반딧불 체험을 할 때 나룻배에 같이 탄 한 아이가 어두운 하늘을 손으로 가리키며 "달이 우리를 좇아와요"라고 말했다. 그제야 나룻배 위에 환하게 떠있는 달을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