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도권 정치 / 정치 부재
"웃자고 한 말에 죽자고 달려든다."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얘기다. 듣는 이를 머쓱하게 만드는 이 말은 때로 무섭다. 누군가 웃자고 한 말이, 누군가에게 비수로 꽂힐 수 있는 말이라는 인식 자체를 유머러스하게 질식시키는 프레임의 힘이 엿보인다. 이 말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 수도 있다. 프레임의 힘을 뚫고 나와 죽자고 달려들 때, 주변 분위기는 언다.
이런 불편함은 귀하다. 더욱 불편해지도록 도와주지는 못하더라도 그 불편함을 감내해 줄 필요는 있다. 거창하게 말해 이게 민주주의다. 민주주의는 시끄럽다. 교과서에 나올 법한 이야기지만 민주주의에서 다양한 이해관계간의 갈등은 필연이다. 민주주의가 성숙한 나라일수록 그 나라의 시민들은 고되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소란스럽고 곳곳에서 갈등이 분출될 수밖에 없는 수준 높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공적인 목소리들로 인해 불편을 겪는 사적 일상은 어쩌면 일종의 대가인 셈이다.
최근 누구나 아는 사례도 있다. 대통령 탄핵을 요구하는 시민들이 거리에서 밤을 새웠다. 제도권 정치와 무관한 개인적인 일상을 병행하며 외친 목소리들이다. 자신들의 몸이 고된 것은 물론이고, 그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 특정 공간에서 원래의 일상에 변수를 만난 또 다른 사람들은 불편함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외신에서도 민주주의 모범 사례로 평가한 탄핵 시위는 결실을 맺었다.
다만 뼈를 때리는 말이 들린다. 한 외국인이 우리나라의 탄핵 시위를 보면서 왜 한국 사람들은 퇴근하고 저녁 시간에 집회를 하느냐는 의문의 말이다. 자기들 나라에서는 이른바 일할 시간에 거리에 나와 시위를 한다는 것이다. 시위를 할 거면 파업을 하며 해야지 왜 개인적인 시간인 퇴근 후 시간을 쓰면서까지 고생을 하느냐는 말이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한국은 한국의 사정이 있다. 고도의 민주주의 사회를 만들어 갊에 가중되는 시민들의 불편을 조금이나마 덜어줄 완충지대의 부실함. 공적인 갈등을 중재하고 조정해야 할 권한이 부여된 곳에서 제역할을 못 하고 있는 현실. 시민들의 민주주의 의식은 앞으로 뛰어가지만, 이를 뒷받침할 제도권 정치는 제자리걸음이 아니라 오히려 뒷걸음질 치고 있는 모양새다.
탄핵만큼 나라의 중대한 사건이라고 하기는 작아 보이는, 그렇지만 누군가에게는 탄핵보다 절실하고 첨예한 갈등이 대전에서 벌어지고 있다. 지난 2일 대전 둔산여자고등학교는 학교장의 이름으로 '2025학년도 석식 운영 중단 안내'라는 제목의 가정통신문을 공지했다. 닷새 후에는 역시 학교장의 이름으로 '2025학년도 석식 운영 중단에 따른 후속 안내'라는 가정통신문이 홈페이지에 올라왔다. 가정통신문에는 '지난 2월, 전국학교비정규직노동조합 대전지부에서는 쟁의 행위 돌입(종료 기한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음)을 통보하였고, 이에 따라 3. 27.(목) 우리 학교 조리원이 쟁의 행위 내용을 학교 측에 전달하였습니다'라는 내용이 담겼다. 쟁의행위 통보 내용도 순번을 넣어 정리해 알렸다.
①교직원 배식대 거부, ②냉면기 사용 거부(월 2회까지만 허용), ③반찬수는 김치 포함 3찬까지 허용(그 이상은 거부), ④뼈나 사골, 덩어리 고기 삶는 행위 거부, ⑤복잡한 수제 데코레이션 거부, ⑥튀김이나 부침기를 이용한 메뉴(전, 구이) 주 2회 초과 거부이며, 이는 중식과 석식을 모두 포함하여 적용됩니다.
둔산여자고등학교 급식 조리사들의 파업은 급기야 학부모들의 반대 투쟁을 불렀다. 실제 일부 학부모들은 지난 7일부터 매일 아침 피켓을 들고 “아이들 볼모로 하는 쟁의행위 철회하라!”고 외치며 시위를 하고 있다. 누구보다 불편한 사람 급식을 먹어야 할 학생들이다. 11일 둔산여고 제30대 학생회는 전날부터 급식실과 교내 주요 출입문 등에 붙인 '중식 운영 변경 및 석식 중단에 대한 둔산여고 학생회 의견'을 통해 "급식 조리사님들의 처우 개선 등 권리 찾기를 위한 준법투쟁에는 반대하지 않는다"면서도 "투쟁 제시 조건에 따라 학생들의 급식 질 저하, 석식 운영 중단 등 건강하고 안정적인 급식 제공이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고 우려했다.
학부모와 학생들의 집단적인 목소리는 '볼모'라는 프레임이 덧씌워질 경우 조리사들의 준법투쟁에 상당한 타격을 줄 수 있다. 아이들의 급식을 볼모로,라는 말은 사람들의 감정을 건드리기에 충분하다. 서로 다른 이해관계의 대립이 옳고 그름이라는 이분법적 공방으로 비칠 수 있다. 더욱이 대립 관계의 한 당사자는 갈등 구조에서 잠시 발을 뺄 여유를 누릴 수도 있다. 타협되지 않는 갈등에서 남는 건 불편을 감내해야 할 사람들뿐이다.
파업을 해서라도 자기들의 권리를 주장하며 고용주체와 싸우는 불편함을 선택한 조리원들, 직접적인 불편을 겪고 있을 학생들, 자녀들의 건강권이 위해 거리로 나서는 불편함을 감수한 학부모들.
파업한 조리원들은 학생도, 학부모도, 학교도 아닌 대전시교육청과 싸우는 중이다. 현재 전국 대부분 학교들은 학교마다 조리원을 두고 급식을 만들어 제공하는 ‘직영 급식’을 하고 있다. 2006년 CJ푸드시스템(현 CJ프레시웨이)이 위탁 급식을 맡은 학교들에서 집단 식중독 증세가 나타난 후 학교급식법이 개정돼 2010년부터 직영 급식이 의무화됐기 때문이다. 이에 전국 시·도교육청들이 채용하는 조리원들은 무기계약직으로 사실상 정년이 보장된다. 하지만 노동 강도에 비해 임금이 낮아 정년 전에 퇴사하는 사람이 많다. 전국학교비정규직노동조합(학비노조)에 따르면 작년 조기 퇴사율은 60.4%에 달한다.
앞서 급식 조리원 처우 개선을 주장해 온 학비노조 대전지부는 대전시교육청과 벌여온 직종 교섭이 최종 결렬되자 지난 2월 14일부로 쟁의행위를 통보한 상태다. 대전시교육청 측은 조리원들의 요구가 과하고, 학생 건강을 해칠 수 있어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교내 민주주의는 갈수록 성숙해지고 있지만, 그에 따른 불편을 덜어줘야 할 정치가 안 보이는 현실이다.
학부모들이 불모라는 단어를 쓰면서 직접 피켓을 들고, 학생들이 직접 대자보를 붙이는 지경까지 오게 된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 조리원들? 가정통신문을 열심히 공지하고 있는 학교장? 불편에서 발을 뺀듯 한 교육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