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인간적인 / 이기심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의심의 여지없는 온전한 이타심은 성인군자에게나 가능하지,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이기적인 것인 당연한 본성이라고 말했다. 사람들의 이타심에는 이기적인 이해관계가 깔려 있고, 그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그러기에 이기심을 불편해하지 말고 당연한 인간의 본성으로 인정해야 행복을 정복할 수 있다고 <행복의 정복>에 썼다. 러셀식으로 말하면 ‘이기심의 확장된 형태로서의 이타심’이라는 개념이다.
스승의 날은 어느 쪽의 이타심이 발현되는 날일까? 아니, 스승과 제자 누가 더 강하게 이타심을 내보였던 날일까.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제자 쪽이라고 얼른 수긍이 간다. 그동안 자신을 보살피고 가르쳐준 선생님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하기 위해 스승이 만족할 만한 말과 행동을 고민하고, 스승의 미소를 기대하며 마음을 표현할 수단을 고른다. 내 마음보다 스승의 마음을 먼저 헤아리는 마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스승의 날에 스승의 이타심을 말하기란 부자연스럽다. 감사든 무언이든 받는 입장이기 때문에 이타심을 보였다고 말하기에는 괴리감이 있다. 하지만 조금 더 생각을 파고들면 간단하지 않다. 입장 바꿔 생각할 필요도 있고, 러셀의 생각에서 도움을 얻을 수도 있다. 정말로 선생님들은 스승의 날에 자신을 찾아오는 과거 제자들이 한없이 반갑고 고맙기만 할까? 옛 제자를 만난 선생님들이 당연히 취할 법한 행동과 말에도 이기심이라는 인간의 본성이 배어 있을 텐데?
옛 제자가 자신을 불쑥 찾아오는 일이 생각만큼 달가운 일이 아닌 선생님들도 있다는 것이고. 미리 찾아뵙겠다는 연락을 하고 오더라도 일부러 시간을 빼야 하는 불편함에 한숨을 내쉬는 선생님들도 있을 테다. 모든 선생님들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선생님들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선생님들도 실제 행동은 일반적인 상식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열심히 이타심을 실천하는 제자들에게 찬물을 끼얹는 것은 인간적으로 못할 짓이라는 생각이 강할 것이다. 자신의 이기심은 저 깊숙이 숨겨놓고 애써 미소를 지우는 일이 순탄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란 판단이 쉽게 선다. 속내를 그대로 드러내 찬물을 끼얹었을 때 마주할 결과는 생각만으로도 눈을 질끈 감게 만든다.
지난달 28일 공립학교 교사들이 모여 있는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 ‘스승의 날에 단축수업하면서 예전 학교로 선생님 찾아가라고 말아주세요’라는 글이 올라왔다. 글쓴이는 선생님으로 추정된다. “우리 학교는 단축 수업을 안 한다. 수업뿐만 아니라 업무가 많은데 우르르 학생들이 찾아온다”라고 적었다. 스승의 날에 과거 자신을 가르쳤던 선생님을 찾아가 인사를 드리라는 취지로 일부 학교에서 단축수업을 하는 바람에 다른 학생들을 가르쳐야 할 시간이 방해를 받는다는 한탄이다.
선생님 입장에서 이런 속마음을 공개적으로 드러내기 어려웠을 테다. 졸업한 제자를 만나는 일은 당연히 반가워야 할 일이라는 것이 상식이기에 표현하기 불편한 속내다. 하지만 이런 속내가 유별난 감정은 아니다. 기사에 따르면 해당 글에 동조하는 댓글이 90개가량 달렸다.
이런 속내가 자신 만의 불편한 감정이 아니라, 다른 이들도 공감하는 감정이라는 사실은 비슷한 목소리들을 키운다. 개인적인 문제이기보다 공적으로 논의해 볼 문제라는 인식이 퍼지면서다. 그렇게 잘 들리지 않던 불편한 진실이 이곳저곳에서 터져 나온다. 때로는 노골적이게. 그래서 너무나 인간적으로.
“기억하고 찾아와주는 학생들이 고맙지만 양가적인 마음이 든다. 수업 준비 말고도 여러 행정 업무로 정신없는 와중에 학생이 찾아오면 곤란한 건 사실”(대전 소재 고등학교 교사)
“스승의 날이지만 방과 후에 수업준비를 해야하는 건 마찬가지이니 부담되는 부분이 있다. 다음날 수업 준비를 두 시간 내내 해도 촉박한데 졸업생들이 몰려오면 수업 준비가 밀리고 퇴근이 늦어지는 경우가 있다.”(세종시 소재 초등학교 교사)
투정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어떤 말보다 용기를 낸 목소리도 들린다. 속물적으로 보일까봐 주춤되면서도 비슷한 처지에 있을 타인들을 떠올리며 나라도 말을 해야겠다는 심정이 엿보이는 목소리다. 자신의 치부를 들춰내서라도 진실을 말해야겠다는, 조금 과장하면 비장함까지 느껴진다.
“학생들을 빈손으로 보내는 게 마음에 걸리다 보니 식사나 간단한 음료, 하다못해 작은 간식이라도 챙겨줘야 하는데 부담 느끼는 분들도 많을 것”(경기도 소재 중학교 교사)
제자들은 스승의 날을 맞아 오랜만에 옛 스승의 얼굴을 보고 싶기도 할 테고, 감사의 마음을 전했을 때 예상되는 반응을 직관하며 보람을 느끼고 싶을 테다. 스승은 외적-내적으로 성장한 옛 제자의 얼굴을 보는 뿌듯함 못지않게 자신의 시간이 방해받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들 수 있다.
스승의 날을 맞아 제자들의 이기심만큼만이라도 스승들의 이기심이 권장되는 날이 올까, 스승들의 이런 이기심이 인간 본성이라기보다 어쩔 수 없는 빡빡한 일상에서 여유를 갖기 어려워 생기는 감정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며 글을 쓰니 어깨가 오랜만에 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