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채/ 자산가격
친한 후배가 술자리에서 고민을 꺼냈다. 서울에 있는 아파트 분양에 당첨이 됐는데 계약을 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기는 그렇게 큰돈이 없다며 한숨을 쉬었다. 바로 후배를 나무랐다.
"야 임마. 돈 없어서 분양권을 포기하는 바보가 어딨어."
"그럼 어떡해요. 몇 억을 어디서 구해요."
"은행에서 대출받아야지. 다들 그렇게 사."
"아직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본 적이 없어서요."
"별거 아니야. 해보면 허무할 정도로 쉬워."
"그래도 빚을 진다는 게 영..."
"아우.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바로 은행 가."
"그러다 집값 떨어지면요."
"답답하네. 일단 사. 어차피 올라."
후배한테 한 말은 진심이었다. 내 경험을 봐서도 그렇고 세상 돌아가는 것도 그랬다. 집값은 미쳤고, '부동산 불패'라는 신하는 견고했다. 올해 초까지만 해도 힘을 못 쓰던 부동산이 다시 꿈틀 되면서 집값이 들썩이고 있다. 새로운 정부는 정권 초기라서 더욱 그런지 집값 안정에 강력한 의지를 보이고 있다. 주택담보대출은 실수요자에게 6억원까지만 허용하고, 다주택자의 ‘갭투자’(전세 끼고 집 사기) 등 투기 수요는 차단하겠다는 것이 이재명 정부가 꺼내 든 부동산 대책의 골자다. '역대급 조치'라는 평가가 나온다.
대표적으로 노무현 대통령 시절인 참여정부 때가 그렇고, 정부의 강력한 부동산 대책이 나올 때마다 여론은 팽팽히 갈렸다. 세금 폭탄이니, 실수요자만 피해를 본다는 등의 부정적인 목소리 반대 편에는 악의적인 프레임으로 팩트를 왜곡하고 있다며 정부 대책을 우회적으로 옹호하거나 대출규제에 더해 공공임대주택 등의 공급확대 정책이 추가로 필요하다는 주장이 거셌다. 상반된 입장들에는 나름의 팩트와 논리가 담겨 있기에 어느 쪽이 무조건 옳다고 말하기 어렵다. 부동산 문제가 그 해법을 두고 진영논리에 기반한 정치적인 색깔을 띠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게 수많은 정부 대책에도 불구하고 집값은 우상향 곡선을 그리며 '미친'이라는 수식어를 얻었고, '불패'라는 신화를 만들어냈다. 한국은행 분석을 보면 지난해 서울에서 중간소득 수준 가구가 중간값의 주택을 사려면 한 푼도 쓰지 않고 25년을 모아야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부동산 가격은 사실상 매년 올랐다. 수도권 집값은 지난 25년 중 18년 상승했으며, 그중 6년은 두 자릿수 상승률을 기록했다. 이렇게 미친 가격의 불패는 이번 역대급 조치로 마침표를 찍을 수 있을까?
부동산 거품과 딸려 나오는 문제의식은 가계부채다. 두 사안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될 때마다 정부가 긴급하게 내놓는 대책은 단기적인 처방에 가깝다. 문제가 된 특정 시기를 진정시키려는 비상 대책의 성격인 셈이다. 문재인 정부에서만 20번 넘게 대책이 발표된 이유이기도 하다. 이 같은 대책들은 당장의 부동산 시장을 움츠려 들게 만들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듯 보인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해결한 것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미친'과 '불패'가 여전하듯, 수십 년 동안 확인된 팩트다.
그렇다면 장기적인 해법이 필요하다.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방안을 찾아야 한다. 문제의 구조적인 원인을 정확히 진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문제의 본질은 파고들어 가는 일이 우선이다. 공급된 집보다 집을 사려는 사람이 많다는 수요-공급 불일치가 지속되고 있다는 것만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현상이다. 투기적 수요를 감안해도 시장 가격이 형성되는 메커니즘을 벗어난 왜곡된 시장이다. 자연스러운 가격 형성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가격이라는 성격이 강하다. 그렇다면 부동산 가격을 이렇게 떠받치고 있는 주체는 또는 구조는 무엇인가? 계속해서 웃돈을 주고 아파트를 사는 사람이 나타난다는 말인데 그 돈들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결국 유동성 문제라는 인식에 도달할 수 있다. 한 발 더 들어가면 현재의 유동성이 발을 딛고 있는 화폐 체제에 대한 문제의식에 접근할 수 있다. 오늘날 화폐 시스템은 피아트(Fiat) 체제로 정의된다. 금이나 실물자산에 기반하지 않고 정부와 중앙은행의 신뢰에 의해 발행되는 법정화폐 시스템이다. 정부가 화폐발행권을 독점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같은 독점권은 정치적-경제적 목적 등으로 유동성을 지속적으로 늘리는 방향으로 쓰였다. 이에 화폐가치는 매년 하락하며 인플레이션이 고착화됐다. 정부는 2% 정도의 인플레이션을 건전한 물가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렇게 사람들은 화폐가치 하락으로 자신이 갖고 있는 돈의 구매력이 매년 떨어지는 상황에 둔감해 진다. 물가 상승은 당연한 것으로, 즉 상식적인 일로 인식되고 있으니. <화폐전쟁>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경제학자들은 소비물가의 통화 팽창에만 관심을 두고, 높은 수치의 자산 인플레이션 현상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이런 화폐제도는 저축자들에게 가혹한 형벌이다. 이것이 주식과 부동산시장에 위험이 많은 것을 알면서도 투자하지 않으면 더욱 위험하다고 말하는 이유다."
인플레이션을 상식으로 만든 통화량 증가는 투자자산 향하는 새로운 돈줄기를 끊임 없이 창출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부동산이 대표적인 투자 자산이다. 가계 자산 비중 가운데 부동산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은 나라다. 통계청이 집계한 2023년 3월 말 기준 국내 가계 자산 중 부동산이 차지하는 비중은 78.6%였다. 주요 선진국인 미국(28.5%), 일본(37%), 영국(46.2%) 등에 비해 현저히 높은 수준이다.
시장에 끊임없이 유동성을 공급하는 주체는 정부보다 민간 상업은행이라고 말하는 것이 정확하다. 중앙은행이 공급하는 법정화폐인 본원통화를 바탕으로 은행들은 신용 창출이라는 마법을 통해 실제 시장에서 유통되는 유동성을 공급한다. 예금보다 많은 양의 대출로 사실상 무에 유를 만들어 내는 셈이다. 이를 부분준비제도라고 말한다. 예컨대 예금 10억원 중 1억원(지급준비율 10% 시)만 준비금으로 보관하고 남은 9억원을 반복 대출하면 총 100억원의 신용(대출)이 창출된다. 현재의 집값은 부동산이 희소해서 치솟은 것보다 은행들이 마법을 부려 공급한 돈들이 겹겹이 쌓아 올린 탑인 것이다. 현재의 상업은행들이 부동산 시장의 거품을 부추기고 떠받치고 있다는 문제의식은 최근에 발간된 <부채로 만든 세상>에 잘 담겨 있다. 책의 서평 기사에서 아래와 같은 문장이 나온다.
"부채의존경제에서는 자산가격이 신의 자리에 오른다. 부채를 땔감 삼아 상승한 자산가격이 자칫 하락할 경우, 부채상환이 불가능해지면서 경제가 파탄 나기 때문이다. 주가 부양은 부채의존경제의 지상명령이고, 중앙은행의 자산가격 지지 정책도 뒤따른다. ~ 저자는 과잉금융, 부채의존경제에서 벗어나려면 은행제도 개혁이 필수라고 말한다. 개혁을 위한 대안은 100%준비제도다."
결국 미친 집값의 불패 신하는 법정화폐 체제 내의 상업은행 시스템이 만들어 낸 부채 거품이라는 본질에 닿는다. 본질에 따른 장기적인 대책은 정부가 발행권을 독점하고 있는 법정화폐 시스템 자체를 개혁하고, 현재의 은행 대출 영업을 근본적으로 뜯어고쳐야 한다. 당장 급한 불을 끄기에는 너무나 이상적이고 급진적인 대안으로 들릴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렇다고 본질을 외면해서는 안된다. 본질적인 문제를 바탕에 둔 정책적 대안을 마련하는 일이, 임시방편적으로 단기처방을 되풀이하는 것보다 오래 걸릴 수 있어도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길이다.
과거 국내의 권위 있는 학자들이 결성했던 경제사상연구회에서 펴낸 <하이에크 연구>라는 연구집에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경제학자인 조순 교수는 "경제와 인간사회의 본질에 관한 그의 이해와 통찰은 매우 깊었으나 이에 관한 기본적인 입장을 떠나서 목전의 문제에 몰두한 적은 없었다"고 하이에크를 평가했다. 그러면서 이런 문장을 썼다.
"사물을 항상 기본적이고 장기적으로 보는 시각에는 장단점이 있다. 단점으로는 이 관념은 늘 현실에 우활(迂闊)하게 보이기 쉬운 부담을 지지 않을 수 없다. 하이에크의 경제학도 이와 같은 부담을 졌고, 1930년 후반 이후 30여 년 동안 그의 경제이론(특히 경기이론)이 세상으로부터 거의 망각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런 반면 이 시각에는 장점이 많다. 그것은 어떤 특수한 사안이나 문제가 지나고 나면, 항상 이 시각의 기본적 타당성이 부각되는 경향을 갖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