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소수점 빚, 삭제하기

빚의 주권 1.

by 돈태

“아… 하기 싫어.”


사무실 의자에 몸을 던지듯 앉고 컴퓨터 전원을 켜며, 세현은 습관처럼 중얼거렸다. 전산 시스템에 로그인하자마자 ‘출퇴근 알림’ 팝업이 뜬다. 출근한 지 7분밖에 안 됐는데, 벌써 피곤하다.


세현의 회사는 정부 산하기관의 협력업체다. 이 사무실엔 열댓 명 남짓이 근무 중이다. 정규직은 문 주임과 세현, 둘뿐. 나머지는 대부분 6개월에서 1년짜리 단기 계약직이다. 각자의 책상 앞 가림벽에는 ‘정책지원팀’이라 적힌 팻말이 붙어 있다. 이 팀의 주된 업무는 중앙부처에서 내려온 예산 항목들을 정리해 지자체 시스템에 옮겨 적는 일이다.


세현은 오늘 해야 할 작업을 떠올린다. 이번에 국회를 통과한 추경예산안 가운데 지자체별로 할당될 사업 항목을 정리하고 관련 예산을 기입해야 한다. ‘국가 균형발전 특별회계: 농촌지역 ICT 인프라 구축 지원(2차 추경)’ 항목, 이라고 적힌 엑셀파일을 열었다. 어제 저장해 둔 16개의 시트 중 중간쯤을 클릭했다. 그때, 등 뒤에서 익숙한 문주임의 목소리가 들러왔다.


“세현 씨, 이거 기재부 양식 바뀌었어요. 숫자도 반올림해서 다시 입력해 주세요.”


한숨을 들이쉬고 키보드에 손을 얹으려는 찰나였다. 세현은 속으로 생각했다. ‘어떻게 매번 내가 시작하려는 걸 정확히 알고 말을 걸까?’ 문 주임의 목소리는 억양도, 속도도 없다. 감정을 완전히 배제하려는 사람처럼, 인위적으로 기계를 흉내 내는 듯한 목소리다. 그래서일까, 감정적으로 더 거슬린다. 하지만 문 주임이 틀린 말을 한 적은 없다. 그래도 듣기 싫은 건 어쩔 수 없다. 늘 그렇듯 “네”라고 짧게 대답하며, ‘언제 그만두지…’란 생각이 자동으로 떠오른다. 문득, 뭔가 이상한 느낌이다. 세현은 고개를 갸웃하며 가림막 너머 허공을 향해 말했다.


“반올림이면… 소수점은 다 버리라는 얘긴가요?”


메아리처럼 허공에서 문주임의 목소리가 돌라온다. 처음 목소리보다 약간 흐트러진 느낌의 목소리다.


“음… 일단은. 어차피 기재부는 최종 금액만 보니까.”


‘어차피.’ 이 사무실에서 가장 자주 듣는 단어다. 그 말이 붙는 순간, 책임은 위로 올라가고 재량은 아래로 내려온다.


문주임의 두 번째 목소리는 모호하다. 판단을 내려야 하는 걸까? 세현은 자신도 재량권을 행사해야 할 때인가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틀려도 된다’는 뜻일까, ‘틀려도 아무도 모른다’는 뜻일까?


세현은 순간 고개를 흔들었다. 잡생각이다. 쓸데없는 데 힘 빼지 말자. 오늘 두 번째 혼잣말이 입에서 새어 나왔다. “어차피…” 어차피 의미 없는 생각들이다. 세현은 모니터를 바라보는 눈에 힘을 준다. 그러나 집중이 잘 안 된다. 키보드를 두드리면서도 머릿속에 계속 맴도는 딴생각이 사라지지 않는다.


‘내가 지금 적고 있는, 소수점 없이 깔끔한 이 숫자들이—사실은 전부 빚이라는 거.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이대 나온 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