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의 주권 1.
“아… 하기 싫어.”
사무실 의자에 몸을 던지듯 앉고 컴퓨터 전원을 켜며, 세현은 습관처럼 중얼거렸다. 전산 시스템에 로그인하자마자 ‘출퇴근 알림’ 팝업이 뜬다. 출근한 지 7분밖에 안 됐는데, 벌써 피곤하다.
세현의 회사는 정부 산하기관의 협력업체다. 이 사무실엔 열댓 명 남짓이 근무 중이다. 정규직은 문 주임과 세현, 둘뿐. 나머지는 대부분 6개월에서 1년짜리 단기 계약직이다. 각자의 책상 앞 가림벽에는 ‘정책지원팀’이라 적힌 팻말이 붙어 있다. 이 팀의 주된 업무는 중앙부처에서 내려온 예산 항목들을 정리해 지자체 시스템에 옮겨 적는 일이다.
세현은 오늘 해야 할 작업을 떠올린다. 이번에 국회를 통과한 추경예산안 가운데 지자체별로 할당될 사업 항목을 정리하고 관련 예산을 기입해야 한다. ‘국가 균형발전 특별회계: 농촌지역 ICT 인프라 구축 지원(2차 추경)’ 항목, 이라고 적힌 엑셀파일을 열었다. 어제 저장해 둔 16개의 시트 중 중간쯤을 클릭했다. 그때, 등 뒤에서 익숙한 문주임의 목소리가 들러왔다.
“세현 씨, 이거 기재부 양식 바뀌었어요. 숫자도 반올림해서 다시 입력해 주세요.”
한숨을 들이쉬고 키보드에 손을 얹으려는 찰나였다. 세현은 속으로 생각했다. ‘어떻게 매번 내가 시작하려는 걸 정확히 알고 말을 걸까?’ 문 주임의 목소리는 억양도, 속도도 없다. 감정을 완전히 배제하려는 사람처럼, 인위적으로 기계를 흉내 내는 듯한 목소리다. 그래서일까, 감정적으로 더 거슬린다. 하지만 문 주임이 틀린 말을 한 적은 없다. 그래도 듣기 싫은 건 어쩔 수 없다. 늘 그렇듯 “네”라고 짧게 대답하며, ‘언제 그만두지…’란 생각이 자동으로 떠오른다. 문득, 뭔가 이상한 느낌이다. 세현은 고개를 갸웃하며 가림막 너머 허공을 향해 말했다.
“반올림이면… 소수점은 다 버리라는 얘긴가요?”
메아리처럼 허공에서 문주임의 목소리가 돌라온다. 처음 목소리보다 약간 흐트러진 느낌의 목소리다.
“음… 일단은. 어차피 기재부는 최종 금액만 보니까.”
‘어차피.’ 이 사무실에서 가장 자주 듣는 단어다. 그 말이 붙는 순간, 책임은 위로 올라가고 재량은 아래로 내려온다.
문주임의 두 번째 목소리는 모호하다. 판단을 내려야 하는 걸까? 세현은 자신도 재량권을 행사해야 할 때인가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틀려도 된다’는 뜻일까, ‘틀려도 아무도 모른다’는 뜻일까?
세현은 순간 고개를 흔들었다. 잡생각이다. 쓸데없는 데 힘 빼지 말자. 오늘 두 번째 혼잣말이 입에서 새어 나왔다. “어차피…” 어차피 의미 없는 생각들이다. 세현은 모니터를 바라보는 눈에 힘을 준다. 그러나 집중이 잘 안 된다. 키보드를 두드리면서도 머릿속에 계속 맴도는 딴생각이 사라지지 않는다.
‘내가 지금 적고 있는, 소수점 없이 깔끔한 이 숫자들이—사실은 전부 빚이라는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