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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을 이렇게 쓸 수 있다니!

읽고 쓰는 삶

by 돈태

프리드리히 A. 하이에크가 쓴 <노예의 길> 서문을 읽고 딱 떠오른 한 마디는 '간지 난다'다. 일본어로 유행됐던 말인데 우리나라 말로 '멋있다'랑 비슷한 뉘앙스면서 더욱 직감적인 어감이다. 하이에크의 서문을 읽고 불현듯 "와~"라고 감탄사가 나왔다. 딱히 표현할 단어가 떠오르지 않던 차에 '간지'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아래 대목이 대표적이다.


"요즈음 정치적 견해를 드러낸 서적이 출판되면, 저술의 경제적 동기를 찾는 것이 유행처럼 되었다. 이 책을 쓰는 나의 경우는, 개인적 이득의 획득이라는 측면에서는 이 책을 출판하지 '않을'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이유를 가진 아주 별난 사례가 될 것이다. 이 책의 출판은 분명 친하게 지내던 많은 사람들의 기분을 상하게 할 것이다. 이 책을 쓰느라 나는 더 잘할 수 있는 다른 일들을 제쳐 두어야 했고, 이 책 보다 장기적으로 더 중요하다고 여기는 일들도 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이런 정치서적을 출판하고 나면, 사람들은 내가 정말 소중히 여기는 나의 엄격한 학문적 연구성과들에 대해서조차 분명 편견을 가지고 읽을 것이다."


'출판하지 않을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이유'라니! <노예의 길>에 대한 진정성이 넘쳐흘렀다. 안 쓸 이유가 차고 넘쳤지만 써야만 했다는 고해성사처럼 들렸다. 특히 책의 내용이 자신의 이해관계와 무관하며 심저어 자신의 일상 그리고 하는 일 또는 명성에 해가 될 것이라고 예견하면서 썼다는 것이다.


하이에크는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세계적인 경제학자다. <노예의 길>이 너무나 정치적인 내용이라는 것을 잘 알고 썼으며, <노예의 길> 때문에 향후 자신의 학문적 성과가 부당한 대우를 받을 수 있다는 점도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쓰고야 말았다. <노예의 길>은 그 자체가 수단이자 목적이었고, 절실한 글쓰기였던 것이다.


"내가 사회주의에 동조하지 않은 까닭은, 내가 성장하면서 접해 본 친숙한 이론들이 아니어서가 아니다. 사실 그 견해란 젊은 시절 내가 가지고 있었던 것이자 경제학 연구를 나의 직업으로 만들었던 것이기도 하다."


서문에는 강한 자신감도 배어있다. <노예의 길>에서 펼칠 견해와 논리 그리고 사상에 대한 학문적, 철학적, 역사적 자신감이다. 그 자신감은 과장되거나 감정적이지 않고 글의 설득력을 높인다. 어쩌면 불명예스러울 수도 있을 법한 '사상 전향'을 고백하면서다. 자신의 기존 생각을 뒤엎는 유연함과 성찰은 비판적 지식인의 면모를 잘 보여는 것은 물론, 자신을 매료시켰던 이론을 논리적으로 부정해 낸 끈질김과 용기도 느껴졌다.


결국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했던 사회주의이기 때문에 사회주의를 누구보다 제대로 비판할 수 있다는 자심감이다. 이는 하이에크가 사회주의를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는 반증이다. 이 대목에서는 버트런트 러셀의 '무엇을 확신하는 자는 어리석고, 상상하고 이해하는 자는 의심과 우유부단함으로 가득 차 있다. 그것이 우리 시대 가장 뼈아픈 부분 중 하나다'라는 말이 겹친다.


하이에크는 어떤 결과를 초래하더라도 써야만 했던 글이고, 어떤 반박과 비판에도 흔들리지 않을 내용이라고 서문에 꾹꾹 눌러 담았다. 추상적으로 비칠 수 있었던 자신의 글에 대한 진정성과 자신감을 솔직한 글쓰기로 구체화했다. 글 쓰는 사람이라면 표상으로 삼겠지만, 도달하기 어려운 '솔직히 쓰기'의 전형을 하이에크의 서문에서 본 거 같다. '고해성사', '고백'이라는 진부한 단어를 끌어다 쓸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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