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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회

평온

by 돈태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분명히 그날 노래방에서 내가 먼저 옷을 벗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들 취한 상태에서 노래방에서 나온 맥주를 또다시 원샷을 한 후 나는 내가 신청했던 크라잉넛의 <말 달리자>의 간주가 나오자 두 손을 머리 위로 들고 “옷 벗자”며 소리를 지른 기억이 또렷하다. 아무리 취했어도 그 기억만큼은 분명한데, 만희는 자기가 먼저 옷을 벗자고 했다는 것이다.

“석영이 형이 비틀거리면서 자기 노래를 끝내자 땀이 한 범벅이더라고. 그래서 내가 형한테 옷 벗고 놀자고 말했어. 그러니까 석영이 형이 기다렸다는 듯이 바지까지 벗던데.”


만희의 이어진 말에 나는 다시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게 뭐가 중요하다고. 나는 아무 말 없이 성우와 균봉을 바라봤다. 둘은 안타깝다는 듯이 함께 한탄했다. 둘이 내기라도 한 모양인데 둘 다 틀린 모양새다. 균봉은 제대로 발음을 하기 어려울 정도로 술에 취한 상태다. 성우 역시 눈이 풀려서 술을 더 마시기는 힘든 상황처럼 보였다. 나는 만희에게 그만 술자리를 파하자는 눈치를 줬다. 만희는 발개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너도 혀 엄청 꼬였어”라며 킥킥거렸다.


비틀거리는 균봉을 만희가 어깨동무를 하고 후삼집을 나왔다. 균봉이 만희의 몸에 반쯤 기댄 상태에서 누구를 향한 것인지 모를 욕을 내뱉고 있었다. 그러면서 2차를 가야 한다고 소리를 질러댔다. 성우는 진심인지 모르겠지만 그만 마시자며 균봉이 눈앞에서 손사래를 쳤다. 만희는 아무 말 없이 균봉이 의지를 내보이는 방향으로 부축을 해줄 뿐이었다. 나는 균봉의 어깨에 팔을 얹어 보조를 맞췄다. 고개를 돌려 성우를 바라보며 빨리 따라오라고 손짓을 했다.


2차로 들어간 집은 막걸리랑 전 등을 파는 주막집 분위기의 술집이었다. 반지하 술집답게 음침하면서도 정다운 느낌의 술집으로 이름은 ‘둥지’다. 벽에는 온갖 낙서들이 빼곡했다. 나도 예전에 술이 취해 둥지 벽에다 낙서를 했다. '노를 놓으니 비로소 풍경이 보이는구나.' 군대 가기 전 국문과를 부전공하면서 생긴 버릇이다. 술에 취해 영감이 떠오른다며 폼 잡고 쓴 글인데 시집에서 본 문장을 따라한 것뿐이었다. 자리를 잡고 앉자 균봉이 술버릇이 나왔다.


“야아~ 오늘 주..욱..자. 여기는 내에가 쏘께.”

둥지에 들어간 후 중간쯤부터 기억이 끊겼다. 다음 날 만희로부터 전 날 술값을 정산하는 단체 문자가 왔다. 2차로 간 둥지 술값도 포함됐다. 역시나 균봉은 정신을 잃고 만희의 부축으로 집에 간 거 같다. 만희에게 돈을 보낸 후 석영이 형 카톡을 검색했다. 전 날 의견을 모은 날짜 두 개를 형에게 보냈다. 생각보다 빨리 석영이 형의 답이 왔다. 석영이 형은 둘 다 괜찮다며 우리가 편한 날로 하자고 말했다. 석영이 형과의 문자는 단순히 저녁 약속을 잡는 대화로 끝났다. 석영이 형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들이 많았지만 관뒀다. 어차피 얼굴 보고 이야기하면 될 일이다,라고 생각했다. 석영이 형도 다른 말을 하지 않는 것으로 봐서 나랑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듯했다. 다만 하나 거슬리는 문자가 있었다. ‘요새 평온하지?’ 약속 날짜를 정하고, 대화를 마무리할 때쯤 형이 보낸 문자였다. 막상 문자를 받고서는 별생각 없이 “그럼”이라고 답했다. 그런데 얼마 뒤부터 자꾸 머릿속을 맴도는 문장이다. 특히 ‘평온’이라는 단어가 어색하면서도 뭔가 딱 들어맞는 느낌이다. 내가 아니라 석영이 형한테 물어봤어야 할 의미처럼.


2주가 지났다. 석영이 형이랑 만나기로 한 날짜다. 약속 장소는 역시나 후삼집이다. 군대 2년을 더해 석영이 형과 우리는 3년 넘게 보지 못했다. 학기가 끝나고 방학이라서 나는 집에 있었다. 약속 시간에 맞춰 집을 나갈 준비를 하는데 만희한테 문자가 왔다.

“오늘 만나는 거지?”

“응. 시간 맞춰서 갈게.”

“석영이 형도 별일 없는 거지?”

“응. 오늘 연락은 안 했는데. 다른 말 없으니 올 거야.”

“그래. 균봉이한테 연락해 봐야겠다.”

“그래. 이따 보자.”


만희답게 약속을 확인하는 것은 물론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균봉까지 챙겼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만희보다 균봉이 오늘 약속을 더욱 잘 기억하고 있을 거라는 것을. 그때 마침 성우가 석영이 형이 없는 단톡방에 글을 올렸다.


“난 슬슬 나가려고. 다들 시간 맞춰서 오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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