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산물시장과 내부 갈등

<올바른 고기> 15장.

by 돈태

다음 날 오전, 수영은 그를 다시 회의실로 불렀다. 노트북 화면에는 영상 파일이 아니라 일정표가 떠 있었다. 날짜와 시간, 장소, 방문 동선이 촘촘하게 정리돼 있었다.


“의원실에서 다음 주에 현장 방문 일정을 잡았어.” 수영은 화면을 가리켰다. “수산시장, 대형 유통업체 조리 시설, 그리고 조리 시연 행사까지. 윤리적 조리법 관련 현장을 직접 보는 일정이야. 언론도 일부 동행할 예정이고.”


그는 화면 속 동선을 바라봤다. 방문 시간, 촬영 구도, 인터뷰 가능 지점까지 세세하게 적혀 있었다. 수영이 화면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 일정을 영상으로 정리해야 해.”


그는 잠시 멈칫했다.


“홍보 영상인가요?”


“기록이면서 메시지야.” 수영은 곧바로 말을 이었다. “의원이 현장을 보고, 문제를 인식하고 있다는 흐름이 드러나야 해. 조리 과정의 고통 문제, 제도 개선 필요성, 그리고 입법 추진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지게.”


수영은 준비해 온 문서를 그에게 건넸다. 촬영 포인트와 인터뷰 질문 예시, 편집 방향까지 정리돼 있었다.


“표현 수위는 조정해야 해. 자극적인 장면은 최소화하고, 정책 논의로 이어지는 장면을 중심으로 구성해 줘.”


그는 문서를 넘기다 손을 멈췄다. ‘의원 발언 강조’, ‘현장 체험 장면 반복’, ‘제도 개선 필요성 자막 처리’ 같은 항목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건… 캠페인 영상이랑은 조금 다른 거 같네요.”


그의 말에 수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설득 대상이 달라.”


수영은 의자에 기대며 담담하게 덧붙였다.


“대중도 보겠지만, 정책 결정자들이 보는 영상이기도 해. 우리가 어떤 문제를 제기하는 단체인지, 그리고 협력 가능한 파트너인지도 보여주려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수영은 그의 표정을 한 번 살피더니 말을 이었다.


“메시지 전달 방식을 조정하는 거야. 입법 과정에 실제로 개입하려면 이런 방식도 필요해.”


수영의 말들을 설득을 요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더 묻지 않았다. 문서 위에 적힌 촬영 계획을 다시 내려다봤다. 현장 방문 일정, 의원 발언 순서, 편집 방향. 모든 것이 이미 정해진 흐름처럼 보였다. 수영은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준비 기간 많지 않아. 오늘부터 자료 정리하고 촬영팀이랑 일정 맞춰줘. 그리고 촬영이 끝나면 편집에 속도를 내야 해. 의원실에서도 최대한 빨리 보도자료랑 영상을 배포하기를 원해.”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촬영 계획서를 바라봤다. 잠시 후 수영은 그의 어깨를 토닥이며 먼저 회의실을 나갔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수영은 회의실을 나서자마자 보좌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휴대폰을 귀에 댄 채 사무실을 나와 복도 끝 창가 쪽으로 갔다. 이내 보좌관이 전화를 받았다.


"네. 팀장님."

"통화 괜찮으세요?"

"네. 말씀하세요."

“다음 주 현장 방문 일정, 저희 쪽 준비는 문제없습니다. 영상은 저희가 총괄해서 정리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전에 말한 대로 영상 편집을 최대한 빨리 끝내주세요."

"네. 이틀 정도면 충분할 겁니다."


“예산 등 다른 협력 건은 내부 검토가 조금 필요합니다.” 수영은 잠시 뜸을 들인 후 서둘러 덧붙였다. "정확히는 검토라기보다는 동의를 구하는 과정을 거치려고 합니다."


통화가 끝나자 수영은 잠시 휴대폰 화면을 내려다봤다. 곧 수영은 입술을 굳게 닫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자신의 자리로 가던 수영은 잠시 멈칫하며 사무실 안을 한 번 둘러봤다.


그날 오후, 그는 현장 방문 영상 시놉시스를 정리해 수영에게 메일을 보냈다. 의원 동선과 별개로 조리 과정의 현실을 먼저 보여주고, 이후 현장에서 느낀 의원의 발언이 이어지는 구조였다. 초반에는 실제 조리 장면을 짧게 삽입하고, 화면 하단 자막으로 현재 제도 공백을 설명하는 구성이었다. 곧 수영은 프린트한 시놉시스를 들고 그의 자리로 직접 왔다.


“잠깐 같이 보자.”


그는 수영을 따라 회의실로 들어갔다. 수영은 빨간 펜으로 표시해 둔 부분을 하나씩 짚었다.


“여기. 조리 장면 오프닝은 빼는 게 좋겠어.”


그는 고개를 들었다.


“도입부에서 보여주는 게 더 직관적이지 않을까요.”


수영은 고개를 저었다.


“이번 영상은 문제 제기용이 아니야. ‘의원이 보고 인식했다’는 흐름이 먼저야. 현장 이동 장면으로 시작하자. 조리 장면은 중반 이후, 맥락 안에서 최소한으로.”


수영은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이 자막 문구도 수정하자. ‘현행 제도는 동물의 고통을 방치한다’는 표현은 강해. ‘제도적 보완이 필요한 영역’ 정도로 완화하자.”


그는 아무 말 없이 메모를 했다.


“그리고 여기,” 수영이 의원 인터뷰 질문을 가리켰다. “우리가 질문을 준비할 필요는 없을 거야. 의원이 직접 하고 싶은 말을 영상으로 담는다고 생각하면 돼. 아마 질문이 있다면 같이 온 기자들 쪽에서 나올 수 있어. 우린 의원의 발언을 충분히 담으면 돼."


수영과의 대화는 길지 않았다. 수영은 생각했던 수정안을 그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토를 달 일이 아니라는 것을 그도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이번 영상은 사실상 의원실에서 기획하고 자신은 그 기획을 충실히 이행하면 될 일이었다. 무엇보다 수영의 수정은 계산적이었지만 자연스러워 보였다. 더욱이 단체 운영과 향후 입법 추진을 생각하면 설득력이 높았다.


그는 자리로 돌아와 기존 파일을 열었다. 커서를 움직이며 도입부 장면을 지우고, 의원 동선이 먼저 나오도록 타임라인을 다시 배열했다. 화면 속 영상의 순서가 바뀌는 동안, 그의 표정은 굳어갔다.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데 마음속은 뒤틀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대학 다큐멘터리 동아리에서 영상 기획을 위해 끼니를 거르며 밤샘 작업을 하던 때도 느껴보지 못한 갑갑하고 찝찝한 피곤함이 밀려오는 거 같았다.


며칠 동안 그는 수영의 요구사항을 반영한 기획안을 가다듬고, 현장에서 필요한 촬영장비 등을 점검하고, 편집 영상에 넣을 자료들을 서치 하며 보냈다. 짜인 판이라는 현실은 그에게 시간적 여유를 줬고, 그는 쫓기지 않고 촬영 당일을 준비했다. 중간중간 수영이 그의 촬영 계획을 확인했지만 별다른 요구사항은 없었다. 다만 이전 캠페인 영상을 준비할 때와 비교하면 그를 대하는 태도가 묘하게 달랐다. 처음 그의 시놉시스를 적극적으로 수정한 이후로는 그의 구상을 전적으로 신뢰해 주고 평소와 다르게 격려를 해주는 분위기를 그는 어렴풋이 감지했다.


촬영 당일 아침, 수산시장 입구에는 이미 의원실 차량인 듯한 검은색 카니발이 주차돼 있었다. 아직 해가 완전히 떠오르지 않은 시간이었다. 시장 안쪽에서는 이미 상인들이 분주하 게 움직이고 있었고, 얼음이 쏟아지는 소리와 스티로폼 박스들이 바닥에 던져지는 소리가 시장 입구까지 들렸다.


잠시 후 카니발에서 보좌진 몇 명 내렸다. 이어 카메라를 들거나, 노트북 가방을 멘 기자로 보이는 사람 몇 명도 뒤따라 내렸고, 곧 수영과 친분이 있는 보좌관 얼굴도 보였다. 보좌관은 그를 발견하고 가볍게 손을 들었다.


“일찍 오셨네요.”

“네. 장비 점검 좀 하느라.”


보좌관은 고개를 끄덕이며 주변을 한번 둘러봤다.


“의원님은 조금 뒤에 도착합니다. 시장 안쪽 동선은 미리 확인해 두셨죠?”


그는 준비해 온 촬영 계획서를 꺼내 보였다.


“입구에서 시작해서 수산 코너 쪽으로 이동하는 동선으로 잡았습니다. 중간에 조리 시연 구간도 있고요.”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brunch membership
돈태작가님의 멤버십을 시작해 보세요!

기자 관두고 책방을 운영하며 글을 쓰고 있습니다.

53 구독자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

  • 최근 30일간 5개의 멤버십 콘텐츠 발행
  • 총 25개의 혜택 콘텐츠
최신 발행글 더보기
이전 14화진짜 육식, 취중진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