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동태 Aug 26. 2018

2. 4.19 배후

정민의 흐느낌

 

 8월 폭염이 한창인 오후, 서울 강북구 수유동에 위치한 ‘국립 4·19 민주묘지’를 찾았습니다. ‘참배 대기 광장’에 들어서니 ‘4월 학생혁명 기념탑’이 눈에 들어옵니다. 

 ‘상징문’을 지나 탑에 가까워질수록 작은 무덤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냅니다. 4·19 혁명 당시 사망한 이들을 기리는 묘역이 탑 뒤에 마련돼 있기 때문입니다. 

 무덤 앞 묘비에는 작은 흑백사진이 하나씩 붙어있습니다.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둥근 사진 속 다양한 얼굴들은 무표정합니다. 묘비 앞 면에는 얼굴 사진, 이름, 출신이 적혀 있습니다. 반대 편에는 단 몇 문장으로 이곳에 잠들어 있는 이들의 생애가 짧게 기록돼 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 민주화 운동인 4·19의 시발점은 학생입니다. 대학생이 아니라 고등학생들입니다. 대구에서 벌어진 ‘2·28 학생의거’로 불리는 사건이 그것입니다. 

 이승만 정권 시절 3.15 대선을 앞두고 대구시 8개 고등학교 학생들이 자유당의 독재와 불의에 항거해 일어났습니다. 고등학생들의 저항은 이후 4·19의 불씨가 됩니다. 유시민 작가는 <나의 한국현대사>에서 2·28 학생의거가 촉발된 배경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혁명의 첫 징후가 나타난 곳은 대구였다. 1960년 2월 28일 일요일에 수성천변에서 민주당 장면 부통령 후보 연설회가 열렸다. 그런데 대구의 국공립고등학교에 등교령이 내렸다. 영화 관람이나 토끼 사냥을 명분으로 삼았지만 일요일 등교령의 목적은 학생들이 장면 후보 연설회에 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경북고, 대구고, 경북대사대부고, 경북여고, 대구여고, 대구공고, 대구농고, 대구상고 등 시내 거의 모든 고등학교 학생들이 교사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들은 독재와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함성을 내지르면서 대구 중심가를 달렸다. 이것이 대구 시민들이 자랑하는 ‘2·28 학생의거’다.”


사진 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


 대구 ‘2·28 학생의거’가 일어난 지 58년이 지난 현재, 대한민국 고등학생들은 어떤 대우를 받고 있을까요? 그 어떤 세대보다 정치적인 목소리를 높이며 우리나라 최초의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던 선배를 두고 있는 2018년의 대한민국 고등학생들은 정치적으로 어떤 위치에 서 있을까요?


 지난 4월 19일 국회 정론관에서는 선거연령 하향을 주장하는 기자회견이 열렸습니다. ‘선거연령 하향 공직선거법’을 대표발의 한 국회의원 7명(윤후덕, 진선미, 박주민, 소병훈, 이재정, 표창원) 이 자리에 함께 했습니다.      

 그리고…      


 선거연령 하향을 위해 국회 밖에서 농성을 하고 있는 촛불청소년인권법제정연대의 김정민 양이 기자회견장 마이크 앞에 섰습니다. 선거연령 낮춰달라고 호소하던 정민 양은 끝내 울음을 터트렸습니다. 


사진 4월 19일 국회 정론관에서 김정민 양(가운데)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박주민 의원실. 


 현재 국회에서는 선거연령 관련 법안들의 논의가 지지부진한 모양새입니다. 법 개정까지 이어지지 못했지만 6월 지방선거가 치러지기 전까지는 어느 정도 사회적인 관심을 끌었습니다.      

 하지만 선거철이 지나면서 선거연령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점점 멀어지는 분위기입니다. 더욱이 일부 교육현장에서는 선거연령 하향에 대놓고 반대하는 목소리도 들립니다. 만 19세 이하의 사람들은 미성숙하다는 것이 이 같은 목소리의 주된 논리입니다. 


 실제 한 인터넷 기사에 따르면 지역의 한 교육계 인사는 “선거라는 건 실질적으로 정치행위인데 우리나라는 학교에서의 민주주의, 정치에 대한 교육이 아직 덜 성숙해있는 것이 현실”이라며 “학교라는 특수 공간에서 이런 문제들에 대한 충분한 검토 없이 무조건 연령만 낮춘다면 오히려 역효과만 불러올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정치적으로 덜 성숙했기 때문에 참정권이 주어지면 위험하다’는 발상, 과연 합당할까요? 정의롭나요? 58년 전 대구의 고등학생들을 떠올린다면 이런 사고가 가당키나 할까요?     


 50주년 4·19혁명기념사업회가 편찬한 <4·19혁명사 下> 가운데 한성여중 2학년 진영숙 양이 쓴 편지로 답을 대신해봅니다.      


 “시간이 없는 관계로 어머님 뵙지 못하고 떠납니다. 어머니, 데모에 나간 저를 책하지 마세요. 우리들이 아니면 누가 데모를 하겠습니까. 저는 아직 철없는 줄 압니다. 그러나 조국과 민족을 위하는 길이 어떻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도 생명을 바치더라도 싸우려고 합니다. 데모하다 죽어도 원이 없습니다. 어머니, 저를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무척 비통하게 생각하시겠지만 온 겨레의 앞날과 민족의 해방을 위해 기뻐해 주세요. 부디 몸 건강히 계세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의 목숨은 이미 바치려고 결심했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1-1. 무력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