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 양 논픽션
그때는 몰랐다. 인권이 침해당하고 있었다는 것을. 교실 안에서 순간 느낀 감정을 말로 내뱉는 순간 ‘이상한 학생’이 됐다. 어른들한테는 물론 같은 반 친구들한테도. 그렇게 침묵은 강제되고 있었다. 불쾌한 감정들을 속으로 삭히며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날이 늘었다.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 정민의 무력감은 점점 커져갔다.
2년여 전 여름, 서울의 한 중학교 수업 시간. 정민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곧이어 가슴속에서 뭔가 치밀어 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정확히 어떤 감정인지 자신도 잘 몰랐지만 입술은 떨리고 있었다. 선생님의 말이 불편하다는 것은 분명했다. 순간 정민은 목에 걸려 있던 음식물을 토해내듯 힘겹게 한 마디 한 마디 내뱉었다.
“그렇다고 만약, 여자가 꼬리를 쳤다면은요, 그게, 성폭행이 아닌 게 되는 건가요.”
교실 안은 정적이 흘렀다. 50대 중반인 남자 선생님은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정민을 바라봤다. 같은 반 친구들 역시 정민을 흘깃흘깃 쳐다봤다. 곧이어 친구들의 소곤거림이 들려왔다.
“쟤 왜 저래”, “정민이가 뭐라고 그런 거야?”
‘탁, 탁, 탁’
선생님은 교탁을 치면서 학생들에게 정숙을 요구했다. 방금 전까지 수업 내용과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를 늘어놓던 선생님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수업 내용으로 돌아갔다.
수업이 끝나고 선생님은 정민을 복도로 불렀다. 정민을 바라보던 선생님은 어색한 미소를 지우며 정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선생님이 “기특하네”라는 한 마디를 남기고 교무실로 발걸음을 옮기자 정민은 또다시 가슴속에서 뭔가가 치미는 느낌을 받았다. 이번엔 그 감정이 머릿속에 단어로 명확히 떠올랐다.
‘불쾌해’
선생님은 수업 도중에 포털 등 온라인을 도배하고 있던 연예인 기사 이야기를 꺼냈었다. 남자 아이돌 그룹 출신 가수가 한 주점에서 성폭행을 했다는 내용이다. 정민 역시 해당 기사를 알고 있었다. 당시 상황을 구체적으로 연상시키는 선정적 제목에 눈살을 찌푸렸던 기억이 났다. 선생님은 술집이었고, 거기서 일하는 여성인데 강제적으로 당했다는 것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 술집 여성이 꼬리를 쳤을 수도 있어. 그럼 성폭행이라고 하기에는...”
정민은 아직도 이해되지 않았다. 어떻게 저런 말을 수업 시간에 아무렇지 않게 우리들 앞에서 할 수 있는지. 또 하나 이해되지 못하는 것이 있었다. 교실을 감쌌던 사늘한 분위기. 정민이 선생님의 말을 끊고 자신의 감정을 드러냈던 순간 자신에게 쏠렸던 그 침묵의 시선들에 위축됐던 느낌. 정민은 다리에 힘이 풀렸지만 주저앉지 않았다. 버티고 있는 두 다리를 어느 쪽으로 옮겨야 할지 떠오르지 않을 뿐이었다.
‘도서관으로 가야 하나.’
말수가 적은 정민은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보다 혼자 있는 시간을 즐겼다. 자신의 답답함을 털어놓을 친구가 마땅히 생각나지 않았다. 그런 정민이 교내에서 유일하게 정을 붙였던 공간은 도서관이었다. 점심시간이나 방과 후 등 자유로운 시간이 주어질 때면 교내 도서관을 찾았다. 그곳에서 책을 보며 시간이 편했다. 교내 도서관을 찾는 시간이 늘수록 사서 선생님과 대화를 하는 날이 늘었다. 자연스럽게 사서 선생님에게 친밀감을 느꼈다.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고 복도 끝으로 멀어지는 남자 선생님을 얼음장처럼 굳어서 지켜보던 정민은 주먹을 꽉 쥐었다.
사서 선생님은 젊은 여성이었다. 정민은 사서 선생님의 얼굴을 보자 울음을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사서 선생님은 다급히 정민에게 다가왔다.
“정민아 괜찮니? 왜 그래?”
“선생님 수업 시간에 너무 이상한 소리를 들었어요. 여자가 꼬리를 쳐서 성폭행이 아니라는 말에 너무 화가 났어요. 그래서 그건 아니라고 말을 했는데... 저만 이상한 사람이 됐어요. 그 선생님이 제 머리를 쓰다듬는데 더 화가 나고 무서웠어요.”
사서 선생님은 정민의 어깨를 토닥였다.
“정민아 그 선생님은 정민이를 귀엽게 생각하시는 걸 거야. 기특하다며 머리를 쓰다듬으신 거 같은데. 화가 풀리지 않으면 그 선생님을 찾아가서 다시 말을 해보는 건 어떨까? 아니면 편지를 써서 선생님에게 정민이의 마음을 전해 보는 것도 좋을 거 같고.”
정민은 말문이 막혔다. 남자 선생님은 수업 시간에 분명히 입에 담아서는 안 될 말을 했다. 그런데 사서 선생님은 남자 선생님한테 내가 귀여웠을 거란다. 그리고 선생님을 찾아가 다시 말해보라고? 조금 전까지 북받치던 감정은 사늘해졌다. 정민은 굳은 얼굴로 아무 말 없이 사서 선생님께 가볍게 고개를 숙인 후 바로 뒤돌아서 도서관을 나왔다.
이후 정민은 더욱 말이 없는 학생이 돼 갔다. 친구들과 대화도 더욱 줄었고, 남자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이상한 말을 할 때도 정민은 신경 쓰지 않았다. 수업 시간에 창밖을 바라보며 멍하니 시간을 보내는 날이 늘었다. 정민에게 학교는 점점 답답한 공간이 돼 갔다.
무의미한 나날을 흘려보내며 중학교를 졸업했다. 고등학교는 집에서 조금 더 멀어졌다. 정민은 개의치 않았다. 이미 학교라는 공간에 흥미를 잃은 상황에서 진학을 했다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었다. 중학교 때와 비슷한 생활이 이어졌다. 교실에서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았고 시험 준비나 숙제는 왜 해야 하는지 이유를 못 찾았다. 답답한 마음만 변하지 않았다.
고등학교 생활을 시작하고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정민은 인터넷을 통해 한 시민단체를 알게 됐다. 청소년 인권운동을 하는 단체였다. 중학교, 고등학교에서 인권을 침해당하는 학생들의 이야기에 정민은 마음이 아팠다. 선생님에게 심한 구타를 당하거나 노골적인 신체 접촉 등의 성추행을 당했다는 또래 학생들의 이야기와 이에 문제를 제기하는 학생들을 보면서 정민은 동질감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나도 이 친구들과 함께 하고 싶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뭔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절실해지는 감정도 처음이었다. 정민은 청소년 인권 시민단체에 회원 가입을 했다. 더 이상 학교 안에서 무력하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싶지 않았다.
“참정권이라는 것이 국회의원을 뽑을 권리가 있다는 것도 되지만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 있는 권리라고도 생각해요. 나이가 어리든 많든 뭔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하는데 학교 안에서 학생들은 그렇지 못해요.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는 학생들이 자신의 생각을 말할 수 없는 환경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무력감만 늘었던 거 같아요. 학생들이 투표를 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으면 이런 환경이 조금은 나아지지 않을까 생각해요. 물론 선거연령 하향으로 학교 안에서 벌어지는 인권침해가 모두 고쳐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학생들의 인권을 보장받는 첫걸음은 될 거라고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