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할 거 없는데

대안 없는 퇴사

by 돈태

동네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회사 선배한테 전화가 왔다. 다른 부서에 있어 얼굴 못 본 지 꽤 된 선배다. 전화올 일이 없는데 무슨 일이지? 회사에 사표를 쓴 지 2주일 정도 지났다. 이제 소식을 들은 건가?


"선배 오랜만이에요."

"어떻게 된 거야? 회사를 관둔 거야?"

"네 그렇게 됐어요. 사람들한테 따로 말하지는 않고 조용히 사표 제출했어요."

"그렇구나. 인사 공고 메일 보고 깜짝 놀랐어."

"아, 오늘 메일이 돌았나보네요."


대안 없는 퇴사는 번거롭다. 아직 은퇴라고 하기에는 그래도 젊은 나이. 퇴사 소식을 들은 지인들은 으레 묻는다. 뭐 먹고 살 거냐고. 퇴사를 하면서 당장의 밥벌이를 마련하지 않았다. 이런 물음에 답할 말이 마땅치 않다. 구체적인 답을 원하는 말에 뜬구름 잡는 말들만 떠오른다. 그런데 그런 말이 사실이다. 만들어가면서 살아보려는 중이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하기 난감하다.


"회사 옮기는 거야?"

"아뇨."

"그럼 뭐 하려고?"

"딱히 없는데."

"뭐 먹고 살려고...너 여유 좀 있구나."

"여유가 있긴 뭐가 있어요...그냥 다름 삶을 살려고요."


설명되지 않는 답에 말하는 이도, 듣는 이도 막막하다. 더 묻고 답해 봐야 되풀이다. 만나서 소주 한잔 하면서 이야기를 한다면 문답 과정에서 조금은 구체성이 떠오를 수도 있다. 각자의 시간과 공간을 서로에게 할애하기로 마음을 먹은 상태니 말꼬리를 물다 보면 비집고 나오는 말들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통화에서는 무리다. 서로 시간이 부족하다. 빠르게 다음 주제로 넘어갔다.


"내가 미안하네."

"선배가 뭐가 미안해요."

"그래도 밥 한번 같이 먹어야 하는데."

"언제든 연락하고 보면 되죠."

"밥도 한번 못 사줬는데 날짜 잡자."

"그래요. 다음에 함 잡아보죠."


선배와는 전 직장도 같다. 내가 먼저 회사를 이직했고, 몇 년 뒤 선배도 같은 회사로 왔다. 같은 회사로 이직한 후 얼굴을 보지 못했다. 부서는 달랐고, 선배의 근무지는 지방이었다. 따로 시간을 내서 만나기에도 다소 어색한 사이다. 업무적으로 필요가 있을 때 연락을 주고받으며 틈틈이 서로의 근황을 확인해 왔다. 굳이 따지면 같은 회사에 있는 동문 정도의 감정일 수 있겠다.


선배의 안타까움 또는 미안함은 생각보다 컸던 거 같다. 다음에 자연스럽게 만날 일이 생기면 만나겠지,라고 생각했는데 안일했다. 전화를 끊고 한 시간도 안된 거 같은데 단톡방이 생겼다. 전 직장 후배 두 명이 초대돼 있었다. 같은 곳으로 이직했지만 소원했던 후배, 다른 곳으로 이직했지만 나와는 특별히 친한 후배. 멤버 구성에 고심했을 선배가 떠올랐다.


저녁날짜는 빠르게 잡혔다. 약속이라도 한 듯 선배가 제시한 날짜에 후배들은 동의했다. 내 답만 남은 대화가 이어지고 있다. '그래요'라는 톡을 남기고 이후 대화에는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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