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한 것'보다 '당연한 것'에

동념 흔들기 / 프롤로그

by 돈태

14년을 넘게 누군가에게 질문을 하며 밥벌이를 해결했다. 2010년 10월 언론사에 입사했고, 2024년 12월에 사표를 냈다. 기자질에 대한 회의감을 외면하는데 한계가 왔다.


매일 마감을 위한 질문을 해댔다. 기사로 쓸 만한 것이 없을 때는 기사를 만들기 위해 질문을 했다. 이게 중요한 가,라고 갸우뚱하면서도 질문을 했다. 잘 알지 못하면서 아는 척을 하면서 질문을 했다. 관심 없으면서 누구보다 관심 있는 척을 하면서 질문을 했다. 회사에서 원하니 질문을 하고, 회사가 불편해하니 질문을 못 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스스로 만족스러운 질문은 질문으로만 그쳐야 했다. 무엇보다 회사가 온라인 클릭수에 목을 매면서 질문 자체가 필요 없는 상황이 이어지면서 무너졌다.


공장처럼 기사를 매일 기계적으로 찍어내면서 질문들은 하루짜리 1회 용품이 됐다. 다음날이면 사라질 질문을 하느라 허덕였다. 특정 사안에 대해 끊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질문이 아닌 해당 사안에 덧붙일 수 있는 파편화된 새로운 이야기를 구걸하듯 질문을 이어갔다. 수박 겉핥기식 기사를 위한 질문들에 지칠 때마다 어디선가 들었던 이성복 시인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퇴사를 하고 시인의 <무한화서>를 펼쳐서 그 말을 찾았다.


"신기한 것들에 한눈팔지 말고, 당연한 것들에 질문을 던지세요. "


되새겨온 시인의 말을 활자로 만나니 유명한 그림의 실물을 대면한 것과 같은 강렬한 뭔가를 느꼈다. 정돈되지 않은 머릿속이 질서를 잡아가는 느낌도 받았다. 기사를 쓰기 위해 던졌던 질문들이 허무하게 느껴지며 머릿속이 맑아졌다. 질문을 던질수록 답들로 내가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1회용 질문들과 함께 나 역시 매일 소모되고 있었다는 생각으로까지 나아갔다.


앞으로도 글을 쓰려면 질문을 바꿔야 했다. 단편적인 정보를 조금 더 빠르게 전달하기 위한 질문이 아닌 사고의 틀을 넓히고 깊이를 더해주는 질문이 절실했다. 애용했던 속보, 단독이라는 포장지는 쓰레기통에 처박아도 모자랐다. 이제는 다른 글을 쓰자고 마음을 다잡고 있는 중에 우연히 접한 오태민 교수의 <더 그레이트 비트코인>에 나온 한 문장을 보고 정신이 다시 한번 번쩍 들었다. 기자로 해온 글쓰기를 이제는 바꿔야 할 이유가 더욱 분명해진 순간이었다.


"뉴스를 접하는 순서보다 뉴스를 읽어내는 안목이 더욱 중요하다."


'다른 삶'을 살겠다는 결심은 결국 '다른 글'을 쓰겠다는 욕망을 깔고 있다. 신기한 것, 뉴스가 될 만한 것을 찾아 헤매던 삶을 버리고, 너무나 당연해서 하찮게 여겨지고 그래서 제대로 알지 못한 것들에 의문을 품는 삶으로 한 글자씩 내딛을 작정이다.




이런 생각에는 여태껏 내 생각의 좌표가 돼준 책들의 영향이 크다. 승자독식의 자본주의 사회에 대해 처음으로 질문을 던지게 했던 <복지국가 혁명>, 고등학교 때 외우다시피 한 국사 교과서 내용들을 깡그리 뒤집는 충격을 줬던 <대한민국사>, 성장만능중심의 산업주의에 대안적 시각을 소개해 준 이반일리치의 책들, 정치적 올바름(PC)을 의심해 보는 계기를 마련해 준 <정치적 올바름에 대하여>, 가부장제의 은밀한 권력관계를 엿보게 해 준 <페미니즘의 도전>, 정상의 비정상이라는 상식의 전복을 경험하게 해 준 <이상한 정상가족>, 도덕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들어 준 미셸우엘백과 마광수의 책들, 인플레이션과 제도권 통화정책에 의문을 품게 해 준 비트코인 관련 책들 등에서 기존과는 다른 생각을 해볼 수 있었다. 당장 생각나는 책들만 나열했지만, 내가 감탄한 책들과 저자들은 공통적으로 내가 의심해 볼 생각조차 갖지 못했던 것들을 끊질기게 물고 늘어지며 완성도를 높인 글들이었다.


무엇보다 지금의 생각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올해 다섯 살이 된 아들이다. 작년 네 살이 되면서 부쩍 말이 늘은 아들은 요즘 온갖 것에 질문을 하는 중이다.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해 온 것들에 질문을 던지니 오히려 답하기가 어렵다. 최근 며칠은 하루가 멀다 하고 똑같은 질문을 반복하고 있다.


"왜 파란색에 주차 안 해요."


처음 질문을 받았을 때는 아들이 말하는 파란색이 무엇을 말하는지 몰라 얼버무렸다. 또 물었을 때는 대충 생각이 나는 대로 말했다. "우리 차보다 작은 차들이 주차하는 곳이라서.", "거긴 전기를 충전해야 하는 차들이 주차하는 곳이야." 아들이 말하는 파란색이 정확히 무엇인지 몰랐다. 그래서 틀린 답을 말하고 있었다. 며칠 전 아파트 지하주차장에 들어오는데 바닥에 칠해져 있는 파란색이 눈에 들어왔다. 파란색 바닥에는 장애인 주차공간을 의미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매번 주차를 하며 지나치는 곳인데 그제야 파란색이 보였다. 아들이 다시 물었을 때 용서를 구하며 답을 했다.


"미안해. 아빠가 몰라서 잘못 말했었네. 거기는 몸이 불편한 사람들이 주차할 수 있도록 비워두는 곳이야. 우리는 몸이 불편하지 않으니 거기에 차를 주차하면 안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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