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선배는 책을, 나는 글을

진심이라서 거리가

by 돈태

"오늘 벙개 가능?"


이번에는 거부할 수 없었다. 선배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진심으로 선배라고 생각하는 몇 안 되는 선배한테 연락이 왔다. 내 사표 소식을 들은 선배는 여러번 연락을 줬지만 번번이 만나지 못했다. 또 안된다고 말하기 어려웠고, 선배랑 오랜만에 소주 한잔 하며 서로의 근황과 요즘 생각에 대해 속 깊은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선배가 정한 장소로 이동했다. 술값을 내는 사람이 장소를 정하는 건 당연한 일. 이동 거리가 꽤 되지만 선배가 원하는 장소에 군말을 달지 않았다. 선배의 취향은 나랑 비슷하다. 직장인들이 급하게 끼니를 때우기 좋은 백반집 분위기의 식당에서 선배는 보자고 했다. 자신의 사무실이 있는 건물 지하에 있는 식당이다. 약속 시간보다 10분 정도 일찍 도착했다. 선배한테 미리 주문을 하겠다고 하니, 선배는 삼겹살 아니면 제육을 안주용으로 시키면 된다고 했다. '안주용'이라는 단어를 굳이 언급했다. 밥이 아닌 술을 마신다고 하면 같은 가격이라도 주문음식에 다른 점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거 같다. 제육을 시키면서 안주용이라고 말했다.


선배가 도착하기 전에 음식이 나왔다. 목을 축인다는 생각으로 소맥을 한 잔 마셨다. 선배가 식당에 도착했다. 반가움과 어색함이 섞인 미소를 지우며 선배와 손을 잡았다. 선배와 내 잔에 소맥을 말아 바로 원샷을 했다. 맥주 한 병을 더 시키려는 선배가 두 병을 주문하자고 했다. 나는 그럼 맥주 식는다고 하며 한 병만 시켰다. 선배는 식는다는 표현을 오랜만에 들어서 좋다고 했다. 난 왜 잘 쓰지 않는 식는다는 표현을 썼는지 의아했다.


제육과 계란말이를 안주로 소주 3병, 맥주 4병을 마셨다. 나는 퇴사 후 하루 루틴에 대해, 선배는 자녀의 대학입시에 대해 주로 말했다. 내가 질문을 하고, 선배는 답하는 위주로 대화가 조용히 이어졌다. 선배는 사표를 쓴 이유나 향후 계획에 대해 묻지 않았다. 약속 장소로 오면서 선배한테 무슨 말을 할까, 고민한 것이 무색했다.


술기운이 오르니 목소리가 커지며 서로 할 말이 많아졌다. 시간은 빠르게 지나고 있었다. 집에 갈 시간이 된 듯 해 시계를 보는데 선배가 2차로 근처 치킨집을 가자고 했다. 이왕 나온 건데,라는 심정으로 따랐다. 식당 건물에서 나와 치킨집이 있다는 건물로 향했다. 상가는 치킨집이 있었다는 흔적만 남긴 채 폐업한 상태였다. 선배는 머리를 긁적이다, 근처에 다른 치킨집이 있다고 그쪽으로 가자고 했다.


조금 걸어 도착한 치킨집은 좁은 골목에 있는 노포다. 역시 마음에 드는 공간이었다. 치킨을 안주로 소맥을 말았다. 둘다 혀가 꼬이며 자기 말을 하려고 경쟁했다.


선배는 그간 썼던 책들의 내용과 다음 책으로 쓰고 있는 내용을 열정적으로 말했고, 나는 책이 아닌 글을 매일 쓰려고 노력 중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선배는 현재 소속된 조직을 벗어나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며 자신감을 드러냈고, 나는 최대한 사람 만나는 일을 차단하고 있다고 소신껏 말했다. 선배는 뜻을 함께 할 동지를 모아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펼치려 한다는 목표를 털어놨고, 나는 다른 삶을 실천 중이라며 개똥철학을 늘어놓았다. 선배는 나한테 공을 들이고 있다며 훅 들어왔고, 나는 선배가 하려는 것보다 선배 자체를 신뢰하고 있다며 완곡히 거리를 뒀다. 선배는 구체적인 계획을, 나는 모호한 방향성을 말하며 대화는 흐지부지됐다. 선배와 나는 어두운 거리에서 손을 맞잡은 후 서로의 길을 갔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아들과 거리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