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호항의 하루키

하루키 상, 미안합니다

by 오늘의 혼자

월요일 아침부터 하루키를 읽기 시작했다. 나는 하루키를 꽤 늦게부터 좋아하기 시작한 편이라, 아직도 읽지 못한 작품이 많다. 그것이 다행스럽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2주 전, 회사에서 <해변의 카프카>를 빌렸다. 문단마다 아주 인상 깊게 읽었다는 듯 커다란 동그라미가 군데군데 있는 낡은 버전이다. 나는 왠지 새 책도 좋지만 낙서가 많은 헌 책도 좋다. 아직 다 읽지 못해서 책 얘기는 할 수 없고, 오늘은 전 남자친구와 하루키 이야기를 해 보려 한다.


전 남자친구는 후킹 멘트를 가지고 있는 남자였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실제로도 많이 이상했다) 전시회, 미술관, 카페에서 여자에게 어떻게 말을 건넬지 상상해 보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걸 나에게 항상 이야기해 주었다...!) 나는 그때마다 저질이라며 진저리를 쳤지만 그 말도 안 되는 상상 중에 재미있는 게 많았음을 부정할 순 없다. 좀 더 괜찮은 멘트가 무엇인지 떠올렸던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이건 하루키의 책을 읽고 있는 어느 카페의 여자에게 건네는 후킹 멘트다.


하루키 소설에 나오는 여느 주인공처럼, 그는 푸른색 레이온 셔츠(가 무엇인지 나는 아직도 잘 모른다)의 단추를 목까지 잠그고, 하얀 진 바지에 하얀 테니스화 차림으로 카페에 앉아 두툼한 책을 읽고 있다. (해변의 카프카 104쪽, 오시마 씨의 차림이다.) 무심하게 내려온 앞머리가 그의 얼굴을 살짝 가린다. 그는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있는 예쁜 여자에게는 관심도 없다. 그는 이따금 하늘(혹은 바다)을 보며 생각에 잠기기도 하며 몇 시간씩 책에 집중한다. 세상을 다 잊은 듯이 책에 빠져 있는 남자에게 여자의 시선이 머문다. 사람들이 조금씩 빠져나가고 한산해진 카페, 둘 사이에 미묘한 긴장감이 흐른다. 그는 이제 일어선다. 여자에게 다가가 책을 읽는 그녀의 모습이 아름다워 보였음을 칭찬한다. 그리고 이 말을 한다. "혹시... 하루키를 좋아하세요?"


나는 어이 없다는 표정으로 웃으며 그 멘트를 들은 여자가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곧장 바다에 뛰어드는 것이 아니냐, 와 비슷한 말을 했던 것 같다. 도대체 그 말로 어떻게 여자를 유혹한단 말인가! 이 대화는 이후에도 (개그 소재로) 매우 많이 회자되는데, 첫 번째로 이 이야기를 시작한 곳이 바로 묵호항의 투썸플레이스였다.

투썸플레이스 동해어달해변점. 무척 아름다운 곳이다.

바다가 훤히 보이는 훌륭한 카페에 앉아 고작 꺼낸 이야기가 이것이었는데, 정말 이상하게도 하루키를 읽을 때마다 묵호항의 (다소 추잡해진) 하루키가 떠올랐다. 하루키의 책을 읽으며 고개를 끄덕일수록, 나는 이 후킹 멘트를 날리는 남자의 데이트 신청을 수락할 것만 같은 공포심에 휩싸이고 마는 것이다...!


하루키를 읽으면 마음이 편하다. 하루키를 읽는 모든 사람들이 이럴까? 모두가 같은 이유로 하루키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도, 하루키의 독자들은 무척 많으니까 그중 1%만이 나와 비슷한 감정을 느껴도 그 수는 무척 많을 거다. 세상에 나와 비슷한 사람이 이렇게나 많다니 위로가 된다, 라고 생각하며 카페에서 하루키를 읽고 있으면 어느 남자가 내게 다가와 "혹시... 하루키를 좋아하세요?" 라는 말을 하지 않을까 괜히 주위를 두리번거리게 된다.


이렇게 나는 묵호항의 투썸플레이스와 하루키를 망치고 말았다. 사실은 둘 다 매우 좋아한다. 묵호항의 하루키는 곱씹을수록 웃기고 묘하게 공감이 가기도 한다. 코로나가 끝나면 하루키 소설을 들고 이곳이나 가 볼까. 푸른색 레이온 셔츠와 흰색 진 바지를 입고, 무심하게 앞머리를 드리운 채로. 그런 내 모습을 상상하니 다시 웃음이 나서 그만하고 이제 자야겠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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