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하자면 내겐 병이 하나 있다. 도통 이야깃거리를 찾지 못하는 병. 할 말이 없어서 결국 내뱉는 말은 "요즘, 뭐 재미있는 거 없나(요)?" 친한 친구와는 시시콜콜한 것까지 이야기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곧 돌이킬 수 없는 침묵의 시간이 찾아온다. 말재간이 별로 없는가 보다, 정도로 넘기려 했지만 생각보다 증세는 심각하다.
며칠 전, "저, 다음 주가 마지막이예요"라는 퇴사자의 말에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 왜, 도대체 왜 말을 이어가지 못했니. 다음 주 언제가 마지막 날이세요, 다음에 꼭 같이 밥먹어요, 다시 뵐 수 있으면 좋겠어요 등등. 할 말은 많았다. 말을 할 타이밍을 놓쳐 속으로 눈물만 흘리며 3초가 지나갔다. 물론 "아..."라고 하면서 내 모든 마음속 말과 진심을 담은 표정을 지었던 것 같기는 하지만, 이 말을 끝으로 대화는 종료되었고 우리는 어색하게 지나쳤다.
어른을 어려워하는 것이 아닐까? 나는 매우 공평한 사람이었다. 2주 전 후배님들과의 어색한 점심시간은 지옥보다 더 지옥같았다. 인생을 소중히 여기는 모든 분들께 미안하지만 나는 '지금 당장 죽을 수 있다면...'이라고 생각하며 카페를 (정말 왜 그랬니!) 먼저 나와버렸다. 할 일이 많아서 일찍 들어가 볼게요, 점심시간 즐겁게 보내고 들어오세요! 한강물에 뛰어들고 싶었다.
놀랍게도 나는 말을 꽤 잘하는 사람이다. 장황해지는 게 흠이지만 논리적이고 유창하게 말한다. 엄마는 나보고 "저 입만 산 가시나"라고 했다. 이건 모든 어머님들이 하는 얘긴가? 여하튼 말하는 걸 좋아해서 토론 동아리를 3년, 팟캐스트를 1년간 했다. 문제는 일상 이야기, 잡담이다.
모두들 잡담을 좋아하는 것 같다. 주말에 뭘 했는지, 무슨 드라마가 인기인지, 회사 뒷담화도 하고 가족 이야기도 하면서 화를 내고 웃기도 한다. 나도 당연히 이런 얘기를 좋아한다. 친한 친구와는 세상에 있는 모든 이야기를 다 할 기세로 두 시간씩 핸드폰을 부여잡는다. 다만 회사만 가면 머리가 새하얘진다.
내 얘기는 별로 재미가 없을 것 같다. 주말에는 집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다큐멘터리만 본다. 어느 면에서는 너무 로봇같아서 아무런 불만도 없고 특별히 기쁠 것도 없다. 하루키를 읽었는데요, 나라마다 표지가 다른 것이 흥미로웠어요 같은 건 아무도 흥미가 없지 않을까(라고 생각한다). 친구야 나를 잘 알고, 들어줄 걸 아니까 편하게 얘기하지만, 조금 거리가 있는 사람에게는 왠지 미안해진다. 상대방이 이야기를 꺼내 준다면 적극적으로 들으려 하지만 그렇다고 항상 먼저 말을 걸어 주기를 바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샀다. <한마디 먼저 건넸을 뿐인데> - 이오타 다쓰나리. 다 읽지 않은 책에 대해서는 쓰지 않으려 했건만 처음부터 내 가슴을 후비는 내용들로 가득해서 도저히 쓰지 않을 수 없었다. 하늘에서 누가 나를 보고 쓴 것이 아닌가 싶은 목차. 1장, 말은 걸고 싶은데 할 말이 없어... (네, 저입니다.)
충동적인 E-book 결제. 이걸로 내 잡담력을 키울 수 있을까?책에서는 잡담을 '제3의 대화'라고 소개한다. 친구와 나누는 대화도 아니고 업무를 위한 대화도 아니지만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섬세한 대화 방식이 바로 잡담이란다. 몇 쪽 못 읽었지만 잡담이 부담스럽고, 심지어 잡담을 오해하고 있는 나같은 사람을 위한 꿀팁이 가득하다. 잡담은 꼭 재미있어야 하는 게 아니란다. 신이시여, 제 노잼 라이프도 잡담의 소재가 될 수 있었군요. 감사합니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스몰토크 생활을 위해 책을 구입했다는 소식을 들은 친구는 글로 배우는 잡담이냐며 나를 아주 비웃었다. 그래도 표지에 적힌 "누적 70만 부 베스트셀러 작가의 대표작"을 마음속에서 소리내어 읽으니 왠지 믿음이 생긴다. 과연 이 책을 다 읽으면 스몰토크의 달인이 될 수 있을까? 연애 관련 책 한 권 읽고 애인이 생기기를 바라는 것같은 허무맹랑한 소망에 그치고 말까? 책을 다 읽으면 후기를 쓰겠다. 기대하시라, 초보 잡담러의 성장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