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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정 Oct 23. 2023

냄새3- 가장 강렬한 플래시백*


지난밤 떠나온 시골과는 모든 것이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잠시, 우리가 정말 이사를 온 것일까, 낯선 곳에 온 것일까 이상한 혼란에 빠졌다. 그것은 공기 중에 이내처럼 짙게 서려 있는, 무척 친숙하고, 내용은 잊힌 채 분위기만 남아 있는 꿈과도 같은 냄새 때문이었다. 무슨 냄새였던가.……(중략)……어둠이 완전히 걷히자 밤의 섬세한 발 틈으로 세류가 되어 흐르던 냄새는 억지로 참았던 긴 숨처럼 거리 곳곳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아, 그제야 나는 그 냄새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그 냄새는 낯선 감정을 대번에 지우고 거리는 친숙하고 구체적으로 내게 다가왔다. 그것은 나른한 행복감이었고 전날 떠나온 피난지의 마을에 깔 먹여진 색채였으며 유년의 기억이었다.


                   -오정희 『중국인 거리』중에서



소설의 화자인 소녀는 새로 이사 온 낯선 거리에서 꿈결 같은 냄새와 마주친다. 소녀는 그 냄새가 해인초 냄새라는 것을 가까스로 깨닫는다. 그와 동시에 민들레꽃이 필 무렵 할머니가 끓여주던 해인초를 마시며 횟배를 앓던 기억 역시 의식의 표면으로 떠오른다. “이 시와 나눈 최초의 악수였으며 공감이었던 그 노란빛의 냄새”는 낯설기만 하던 거리를 친숙한 황금빛으로 물들였다. 이름도 얼굴도 가물가물한 옛 친구를 알아볼 때 비로소 유년기의 기억은 쏟아져 나오기 마련이다.


이처럼 냄새를 통해 의식 아래, 깊숙이 묻어둔 기억을 파헤치는 과정은 여러 문학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마들렌 냄새로 유년의 기억을 소환하는 그 유명한 장면을 들여다보자. 소설에서 화자는 마들렌과 차의 냄새와 맛을 통해 콩브레에서 보낸 어린 시절을 회상한다. 프루스트는 여러 페이지에 걸친 세세한 기술을 통해 냄새가 어떻게 기억과 맞닥뜨리는지를 보여준다. 화자는 어느 추운 겨울날 외출에서 돌아와 어머니가 내주는 차와 마들렌을 먹는다. 갑작스레 설명할 수 없는 쾌감을 느낀 그는 그 이유를 찾으려 애쓰다가 그것이 차와 마들렌의 냄새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프루스트는 차와 마들렌의 냄새를 알아보는 순간, 그와 관련된 유년의 기억이 떠오르는 과정을 이렇게 설명한다.


그러자 나의 몸 안에, 깊은 심연에 빠진 닻처럼 끌어올려지기를 기다리고 있던 그 무엇이 움직이기 시작해, 떠오르려고 꿈틀거리는 것을 감촉한다. 그것이 뭔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천천히 올라온다. 나는 그것의 저항을 느끼며 그것이 지나오는 거리의 소란한 소리를 듣는다. ……(중략) …… 그리고 마치 일본 사람이 재미있어하는 놀이, 물을 가득 채운 도자기 사발에 작은 종이 조각을 담그면, 그때까지 구별할 수 없던 종이 조각이, 금세 퍼지고, 형태를 이루고, 물들고, 구분되어, 꿋꿋하고도 알아볼 수 있는 꽃이, 집이, 사람이 되는 놀이를 보는 것처럼, 이제야 우리들의 꽃이란 꽃은 모조리, 스완 씨의 정원의 꽃이란 꽃은 모조리, 비본 내〔川〕의 수련화 마을의 선량한 사람들과 그들의 조촐한 집들과 성당과 온 콩브레와 그 근방, 그러한 모든 것이 형태를 갖추고 뿌리를 내려, 마을과 정원과 더불어 나의 찻잔에서 나왔다.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중에서


유물을 발굴하는 과정을 보는 듯하다. 여러 번의 섬세한 손길 끝에 흙과 먼지로 뒤덮인 덩어리는 본래 지닌 빛깔과 윤곽을 드러낸다. 프루스트는 두 가지 방식의 기억이 있다고 주장한다. 의식적인 노력을 통해 과거를 회상하는 형태의 기억과, 위의 예처럼 차와 마들렌과 같은 매개가 촉발하는 우연한 과정에 의해 되살아나는 기억을 말한다. 프루스트는 소설의 다른 부분에서 의식적 노력을 통해 과거를 기억하려 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라고 이야기한다. 프루스트에게 있어 ‘의지에 의한 기억’은 참된 과거를 전혀 간직하고 있지 않다. 기억을 의식적으로 선택해서 과거를 회상하는 것은 언어에 의한 개념화를 통해 세계를 인식하는 것만큼이나 많은 제한이 있기 때문이다.


프루스트는 진정한 기억이란 지성이나 이성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우연의 영역에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우연은 마들렌과 차와 같은 물질적 대상이 주는 감각 안에 숨어 있다. 화자가 제과점을 지나치며 마들렌 과자를 보았을 때는 과거를 전혀 떠올리지 못했다. 이 사실이 말해주듯 냄새는 다른 감각들에 비해 기억과 더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디킨스가 풀 냄새를 맡을 때 고통스러워했듯이 냄새는 대개 그 기억과 관련된 강한 정서적 환기를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그 기억은 대부분 유년시절과 관련된 것이다. 우리의 자전적 기억은 대개 언어능력의 발달과 함께 형성되기 마련이다. 사물을 추상화함으로써 우리는 머릿속에 개인의 역사를 저장한다. 역사 이전에 언어가 있다. 냄새는 아직 우리의 기억이 언어에 의해 구조화되기 이전인 유년 시절의 기억과 관련되어 있다. 앞서 언급한 소설 속의 화자들은 냄새를 맡고 그것과 관련된 기억을 떠올리기 위해 오랜 시간 동안 노력해야 했다.


우리 역시 우연히 맡게 된 냄새로 묘한 기분을 느낀 후, 그 냄새와 관련된 기억을 떠올리려 노력했던 경험이 있다. 기억상실증 환자처럼 안타깝도록 애쓴 뒤에야 흐릿한 기억이 떠오르기 마련이다. 냄새와 연관된 유년의 기억은 언어로 정연하게 개념화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냄새에 의해 되살아난 기억은 말로 표현하기 힘든 몽환적인 분위기에 가깝다.


그렇지만 냄새로 촉발된 기억과 감정에는 강력한 힘이 있다. 「중국인 거리」의 화자에게 낯선 거리에 적응할 수 있게 해 준 것은 해인초 냄새였으며, 프루스트에게 콩브레를 떠올리게 한 촉매 역시 마들렌과 차의 냄새였다. 냄새는 당시의 이미지뿐 아니라 당시 우리가 느꼈던 기분마저도 고스란히 되살려준다. 냄새는 어떤 매개보다도 즉각적이고 충격적으로 우리를 ‘과거’ 그 자체와 접촉할 수 있게 해 준다. 우리는 냄새를 맡는 순간, 언어로 재구성한 과거의 한 때가 아닌, 실재하는 과거의 한 장면 속으로 깊숙이 미끄러져 들어간다. 냄새가 유발하는 이 강렬한 플래시백은 여러 대중매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애니메이션 《라따뚜이》에서 산해진미에 단련된 냉소적인 음식평론가 안톤이 고를 순식간에 어린 시절의 식탁으로 옮겨놓은 것은 소박한 스튜의 맛과 냄새였다.


남자들에게서 풍기는 애프터쉐이브 냄새는 늘 내 심박을 누그러뜨린다. 성적 매력과는 다른 종류의 감상을 불러일으키는 그 냄새는 내게 듬직함과 편안함을 뜻한다. 몇 년 전, 외가를 방문했을 때 욕실에서 아련하고 풋풋한 냄새를 맡았다. 뚜껑을 닫지 않은 애프터쉐이브 병에서 흘러나오는 냄새였다. 불현듯 그 냄새가 어린 시절의 추억과 연관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외삼촌과 사촌 오빠는 어린 나를 무등 태워주기 좋아했다. 그들의 키만큼 자라난 나는 결코 땅으로 내려오려 하지 않았다. 그들의 목덜미에서 나는 애프터쉐이브 냄새는 그들의 넓은 어깨만큼이나 믿음직하고 의지할만했다. 


나는 그들에게 나던 냄새를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애프터쉐이브를 덜어 양 볼에 두드렸다고 한다. 프루스트는 옛 기억을 떠올린 후에 “인간의 사망 후, 사물의 파멸 후, 아무것도 남지 않을 때에도 홀로 냄새와 맛만은 보다 연약하게, 그만큼 보다 뿌리 깊게, 무형으로 집요하게, 충실하게” 살아남으리라는 것을 말한다. 한다. 프루스트는 옛 기억을 떠올린 후에 “인간의 사망 후, 사물의 파멸 후, 아무것도 남지 않을 때에도 홀로 냄새와 맛만은 보다 연약하게, 그만큼 보다 뿌리 깊게, 무형으로 집요하게, 충실하게” 살아남으리라는 것을 말한다. 


*이야기의 장면을 잇는 기법 중 하나로서 문학, 영화에서 사용된다. 이 기법은 이야기가 순차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도중 갑자기 다른 장면으로 넘어가도록 하는데, 넘어간 그 장면의 시간대는 과거형이 된다. 마치 옛 기억을 떠올리는 느낌, 회상 장면 등으로 흔히 표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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