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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정 Jun 07. 2024

그녀의 무덤가에는 풀이 자라고 있을까

모든 사랑은 외사랑이다. 서로 사랑한다고 믿는 두 사람은 각자의 언어로 사랑한다. 

아주 가끔 찾아오는 합일을 영원으로 착각하면서.

마주 선 두 사람이 같은 방향을 바라볼 즈음, 사랑은 열정을 잃는다. 우정과 이해와 신뢰와 권태가 버무려진 파트너십. 언뜻 견고해 보이지만 위태롭기 짝이 없다.

십여 년 전, 바로 이맘때 그녀의 부음을 들었다. 아직 햇살이 뜨거운 초가을이었다.

십 년 가까이 병석에서 지낸 그녀의 장례식을 찾은 이들은 많지 않았다.

직장 동료도 동창도 지인들도 연락이 끊긴 지 오래였다.

사람들은 그녀를 쓰러뜨린 병이 사랑 때문에 비롯되었다고 말했다. 

그녀가 자신과 많이 다른 그에게 마음을 뺏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몇 번의 데이트와 열없는 대화가 그들 관계의 전부였다. 그는 그녀의 외사랑을 눈치조차 채지 못했을 것이다. 

선량하고 자존심 강한 그녀는 결코 그 남자를 부담스럽게 하지 않았다. 

결혼하는 여자들이 남자를 사로잡기 위해 쓰는 수법은 매력과 유혹만이 아니다. 순진한 그녀는 강짜와 눈물, 협박과 같은 자신이 속한 종족의 야비한 술수를 알지 못했다.

강단 없고 마음 약하고 선량한 그녀는 힘겹게 하루하루 버텨 나갔다.

그녀의 외사랑이 언제 자학과 우울증과 망상으로 변질했을까. 그녀의 절망이 지병을 악화시킨 원인이 되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나는 장례식 이후 다시는 그녀의 무덤가를 찾지 않았다.

이맘때가 되면 그녀의 무덤가에 무성하게 자라났을 풀들을 떠올린다.

그리고 이제 중년의 모습으로 누군가의 남편이자 이버지가 되었을 그 남자, 그녀의 불행에 대해 짐작도 못 할 그 남자를 떠올린다. 

무심하고 행복하게 웃고 있을 누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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