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또 보는 드라마

나의 아저씨

by 일기일회

아주 오랜만에 몇 번을 보고 또 봐도 엉엉 소리를 내며 울면서 보게 되는 드라마가 있었다.

아침 드라마 단골 소재인 주부를 대상으로 쓴 단지 시청률을 올리기 위한 막장 드라마가 아니어서 좋았다.

수목 드라마 단골 소재인 현실성 없이 무슨 일이든 거침없이 해내는 재벌 남자와 씩씩하고 발랄한 캔디캔디 소녀의 서민 사랑이 아니어서 좋았다.

내가 좋아했던 이유는 주변에서 누구나 경험할 만한 일상들 그 안에 희노애락이 있고 어떤 선택이든 결국은 본인이 감당해야 하는 몫이 있다.

하지만 해결의 실마리는 혼자가 아닌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는 것에 있다는 메시지를 드라마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을 통해 전달해 준다는 점이 좋았다.




가상의 후계 역

하루 종일 약육강식이 도사리는 회사에서 심신이 지칠 때로 지친 주인공 동훈이가 안식처를 찾아 내리는 역이다.

축 처진 어깨에 자신의 처지만큼 간당간당 매달린 가방끈을 부여잡고 힘겹게 걷다 보면 정희네 선술집이 나온다.

동네 사랑방 같은 곳 그 안엔 한집 걸러 한집 아버지의 아버지 그 위에 아버지 때부터 자식들까지 맺어온 인연들이 정겹게 술잔을 기울이고 있다.

마흔 중후반을 훌쩍 넘어선 이들은 한때 사회에 충성하고 화려한 리즈시절을 지나 그저 그런 동네 아저씨ㆍ아줌마가 되었다.

그들의 대화엔 소싯적 무용담이 가득 하지만 상대를 비하하거나 자신을 처량하게 말하진 않는다.

술잔이 오고 가고 웃음과 눈물이 오고 가고 정겨움이 더해진 사이 온종일 사람으로부터 받은 상처가 아물지 못했던 동훈의 마음은 시나브로 치유가 된다.


74년 나와 동갑내기 동훈은 특별한 인맥이나 경제력은 없다. 처세술 가득한 회사에서 유일하게 버팀목이 되어주는 건 오로지 실력뿐이다.

자신과 한 번이라도 인연을 맺은 사람들은 누구보다 소중히 여기는 신념이 있다.

한겨울 을씨년스러운 바람이 닳아빠진 검정 단화 위에 보이는 발목 사이로 차갑게 스쳐 지나갈 때 이십 대 지안의 고단함 삶을 안쓰럽게 봐줄 수 있는 사람,

부모가 없는 지안에게 할머니가 돌아가시면 꼭 연락하라고 말하는 사람,

회사를 떠나 어디서 어떻게 만나든 반갑게 인사할 수 있는 관계였으면 좋겠다고 말해주는 사람,

회사 동료 사이에서 아웃사이더인 지안에게 인생은 사람에게 상처 받지만 그 상처는 결국 사람에게 치유받기에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걸 알게 해주는 사람,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인생의 터널도 걷고 또 걷다 보면 언젠간 끝이 보인다고 말해주는 사람이다.


"죽고 싶은 와중에 죽지마라

당신은 괜찮은 사람이다

파이팅 해라

그렇게 응원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숨이 쉬어져

고맙다 옆에 있어줘서"


때론 상처투성이인 지안에게 상처투성이인 동훈도 위로를 받는다.




이 드라마의 결론은 흔히 그렇듯 권선징악으로 마무리가 된다.

하지만 동훈이 다 떠나버린 자신의 집에서 혼자 티비를 보며 인스턴트 컵밥을 먹다 말고 쭈그려 앉아 끝내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그동안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던 아픔, 고통, 두려움, 외로움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와 자신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표현한 것은 두고두고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아픔의 여운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난 생각한다

주인공 동훈이가 마지막까지 자신을 지탱해준 버팀목과도 같은 실력이 진정한 빽이 될 수 있는 세상이 오길..

소심한 듯 살아가는 삶이지만 불의 앞에선 정의로운 모습으로 당당히 맞서 싸워 어떤 힘든 상황에서도 자신이 옳았음을 확인하는 삶이 되어지길..

인연의 소중함을 아는 신념이 자기만의 무기가 되어

세상 모든 이들에게 따뜻한 마음을 내어 주길..

제일 소중한 당신의 삶도 누군가에게서 위로받고 사랑받을 수 있길..




가만히 생각해 보면

누구에게나 동훈이 같은 나의 아저씨가

한 명쯤은 있을 것이다.


한없이 초라해 보이는 날

감당할 수 없는 무게의 슬픔에 빠져 있는 날

너무 부당한 일을 당해 분개하는 날

괜찮아 네가 아무 일도 아니라고 생각하면 아무 일도 아니라고 말해주는 동훈이가 있고

아저씨 참 괜찮은 사람이에요라고 말해주는 지안이가 있다


물론 내게도 그런 동훈과 지안이 같은 수호천사가 있다. 그래서 지금껏 가혹하고 냉정한 이 사회에서 버텨낼 수 있는 힘이 생겼다.


오늘도 자신의 길에서 최선을 다하며 따뜻한 세상을 만들어 주는 많은 나의 아저씨들에게 감사함을 전한다.

당신들이 있기에 내가 내 가족이 내 친구가 내 이웃이 입은 수많은 상처들이 치유받아 자신만의 소신을 가지고 앞으로 묵묵히 걸어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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