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깝고도 먼 나라 중국의 속살을 들여다보는 재미가 솔솔 한 책
전 세계에서 중국과 일본을 인정(존재에 대한 것이 아닌 지표에 의한 그들의 위상에 대해) 하지 않는 유일한 나라가 있다고 한다. 어디일까? 바로 우리 대한민국이다. 긴 역사 속에서 그 두 나라가 우리에게 준 피해(여러 정신적, 육체적 스트레스 포함)가 그 원인일 것이다.
예전에 '일본 열광(김정운 저)'이라는 책을 통해 일본의 문화에 대해서 무척 재미있게 들여다본 적이 있다. 물론 나도 '국뽕'기가 전혀 없는 그런 사람은 아니나, 특정 국가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그 선택에 앞서 어느 정도의 앎은 꼭 필요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그 두 나라 안에도 우리와 똑같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기에. 그때는 일본이었다면 이번엔 중국이다.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는 인민-영수-독서-글쓰기-루쉰-차이-혁명-풀뿌리-산채-홀유의 10가지 단어로 중국을 이야기한다. 다소 지루할지도 모른다는 내 선입견은 책을 읽으면서 금세 깨졌다. 내용 자체도 흥미로웠지만 중간중간 저자 '위화'의 (던지는 듯 푸념하는) 표현을 읽을 때면 예전에 읽었던 '녹정기'라는 무협지속 주인공 위소보를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워낙 개인적인 느낌이라 정확한 표현은 어렵지만 깨방정 캐릭터를 상상해보면 조금은 이해가 되지 않을까 싶다).
그는 간결하면서도 유쾌한 표현을 책 여기저기에 뿌려놓았다. 이런 생각은 나만의 생각이 아니라는 것을 책 중간쯤에서 알게 되었다. 다음의 인용 부분을 보자. "그 예시로 여러 해가 지나 중국의 비평가들은 나의 언어 서술이 매우 간결하다고 칭찬하곤 했다. 그럴 때면 나는 농담으로 이렇게 말했다. '그건 내가 아는 한자가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나의 작품이 영어로 번역-출판되자 미국의 한 문학 교수는 영어로 번역된 나의 언어가 마치 헤밍웨이의 언어 같다고 말했다. 나는 내 농담을 미국으로 수출하여 이 교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헤밍웨이도 아는 영어 단어가 그리 많지 않았나 보군요.'(136쪽)
10가지 부분 중 개인적으로는 '독서' 부분이 가장 좋았다. 책을 좋아하는 개인적 성향 때문일 것이다. 중학생 때 '삼국지'에 흠뻑 빠졌으나 전권을 한 번에 사기에는 가격이 부담스럽다고 생각해서 부모님께 말씀드리지 못한 적이 있다. 대신 1~2일에 1권씩 10권을 차례로 사 보았는데(결국 10권을 다 샀기 때문에 총금액에는 차이가 없었다) 그때의 열정과 비슷한 모습이 저자 '위화'의 어린 시절에도 있었기에 동질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물론 시대적인 상황상 '위화'쪽이 더 절절해 보이긴 한다.
그는 자신의 독서 이력에 대해 “나는 매번 위대한 작품을 읽을 때마다 그 작품을 따라 어디론가 갔다. 겁 많은 아이처럼 조심스럽게 그 작품의 옷깃을 붙잡고 그 발걸음을 흉내 내면서 시간의 긴 강물 속을 천천히 걸어갔다. 아주 따스하고 만감이 교차하는 여정이었다. 위대한 작품들은 나를 어느 정도 이끌어준 다음, 나로 하여금 혼자 걸어가게 했다. 제자리로 돌아오고 나서야 나는 그 작품들이 이미 영원히 나와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104쪽)라고 설명한 적이 있다는데 이 부분에서는 동질감을 넘어선 일체감 같은 느낌을 받기도 했다.
최근에 읽은 책들에서 반복적으로 문학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 책 속 문학에 대한 표현도 상당히 매력적이었는데 다음과 같다. 만일 문학에 정말로 신비한 힘이 존재한다면 나는 아마도 이런 것이 그 힘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독자로 하여금 다른 시대, 다른 나라, 다른 민족, 다른 언어, 다른 문화에 속한 작가의 작품 속에서 자신의 느낌을 읽을 수 있게 하는 것. 그것이 문학의 힘이다.(108쪽)
다 읽고 나니 중국의 근현대 60년이라는 시간이 이질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혁명의 이름하에서 작가도 풀뿌리들도 극도의 부침을 겪어왔다는 것. 그것은 급성장과 함께 성장통을 겪은 우리와도 너무나 흡사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극단적으로 억압된 시대는 사회의 급격한 변화에 따라 반드시 극단적으로 방종하는 시대를 조성한다는 것이다. 그네를 타는 것처럼 한쪽 끝이 높이 올라가면 반대쪽 끝도 높이 올라갈 수밖에 없다.(194쪽)라는 작가의 말처럼 말이다.
후기에서 작가는 "타인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 되었을 때, 나는 진정으로 인생이 무엇인지, 글쓰기가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이 세상에 고통만큼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 쉽게 소통하도록 해주는 것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353쪽)라고 말한다. 이 부분에서 얼마 전 읽은 수전 손택의 '타인의 고통'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서로의 고통에 대해 깊이 있는 이해가 있어야만 소통이라는 단계로 한걸음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조금 생뚱맞지만 위화식 표현을 빌려 다음과 같은 문장을 중국에 수출해볼까 한다. "대한민국과 중국의 고통이 다르지 않다는 것. 대한민국과 중국의 미세먼지가 다르지 않다는 것."
옮긴이의 바람처럼 이 책을 통해 나는 '중국'이라는 나라를 관념의 대상에서 옆에 살아 숨 쉬는 실체로 인식하는 계기를 갖게 되었다. 더불어 왜곡된 편견과 과장된 인식도 다소나마 보정할 수 있는 기회였다. 아직은 개인적으로도 소통의 단계까지 가려면 멀었음을 느끼지만 모든 변화는 작은 변화에서 시작되는 거 아닐까라는 생각으로 독후감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