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의 흉터

by 실비아 선생

딸의 흉터


이석례


그해를 3일 남겨둔 어느 날 기차를 타고 창원에 왔다. 그 때부터 지금까지 창원에 기반을 두고 장거리를 오르내리는 인생이 됐다. 창원 오기 1주일 전에 결혼식을 올린 남편이 창원산업단지에 있는 철강회사에 취직을 했기 때문이다. 전에는, 남편도 나도 경상도 지방에 와본 적이 없었다. 남편 외에 아는 사람이 없는 나는 첫 일 년은 거의 밤낮으로 잠을 잤던 것 같다. 경상도 말을 잘 알아듣지도 못하겠고 사람들을 사귈 줄도 몰랐다. 더군다나 주변 환경도 삭막하기 그지없었다. 도시계획 개발로, 깡촌 같은 창원은 곳곳에서 공사가 벌어졌던 것 같다. ‘창원출장소’ 시절, 그러니까 창원시 태동기부터 살았고 세월이 흘러 우리 가족은 벌써 3대가 됐다.

창원시는 호주의 캔버라 시를 모델로 하여 만든 한국 최초의 계획도시인데 계획과 발전이란 이름 아래 사라진 동네를 나는 아직도 많이 기억하고 있다. 대문도 없어 안이 그대로 보이는 작은 집들이 코를 맞대고 있는 남루한 동네. 끼니때가 되면, 아이가 넷인 집에서는 된장국을 끓이고 건너편 집에서는 미역국을 끓이고 또 앞집에서는 고등어를 굽는 냄새가 골목을 가득 채웠다. 그 곳 길가 집에 ‘파란미술학원’ 간판이 붙어 있고 그 옆에 연달아 세탁소와 구멍가게도 있었다. 우리 집 세 아이는 그 동네 골목을 오르내리며 미술을 배우고 올망졸망한 장난감을 사서 갖고 놀며 시간을 보냈다.

옛 상남오일장은 아직도 내게는 깊은 추억으로 남아있다. 가끔 남편 회사에서 장보기 차를 제공해 줘서 마산 어시장이나 부림시장으로 나가기도 했지만 하천 옆에서부터 안쪽으로 넓게 펼쳐지는 상남장이 최고였다. 구역별로 옷, 그릇, 생선, 과일, 주전부리 등 다양한 품목의 난전이 펼쳐져 없는 게 없었다. 간혹 일요일과 오일장이 겹치는 날이면 가족 모두 장에 놀러갔다. 지금도 뚜렷하게 기억나는 것은 닭 잡아주던 난전이다. 닭장 안에서 모이를 쪼아 먹고 있는 닭 중에 한 마리를 선택하면 그 닭을 꺼내 눈 깜빡할 사이에 죽여 털을 뽑아 척 건네줬다.

이 보다 더 선명하고 잊지 못할 기억도 있다. 우리 부부는 아들 둘을 연년생으로 낳아 기르면서 딸을 또 낳았는데 그 딸이 첫 생일이 지났을 때부터 먹지를 않고 밤낮으로 울어댔다. 육아에 대한 경험도 상식도 없는 나는 아이 셋을 키우는 것이 정말 지옥 같았다. 더군다나 친정도 시댁도 멀리 있으니 나를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 때 나는 딸을 들쳐 업고 창원과 마산까지 안 가본 병원이 없었다. 의사 앞에서 울기도 하고 한의원에 가서 진찰을 받고 한약까지 달여 먹여 보았지만 나아지지가 않았다. 이유도 알 수 없고 아이는 점점 더 피골이 상접해갔다. 아이를 보는 사람들이 한 마디씩 했다.

“아이고 왜 이리 아가 말랐노. 이, 사람 되겠나?”

어느 날 시어머니가 충청도에서, 버스를 세 번 갈아타고 기차를 서너 시간 타고, 무당을 한 사람 데리고 왔다. 굿을 해야 된다고 했다. 무서웠지만 할 수밖에 없었다. 그 때는 창원에도 아파트가 여기 저기 지어져서 우리도 아파트에 살았다. 현관문을 열어놓고, 무당이 거실에서 발을 구르고 뛰어다니며 칼을 휘두르고 주문을 외워댔다. 그렇게 소란을 피웠지만 아무도 구경하러 오는 사람이 없어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나중에 알고 보니 앞집에서는 현관문 외시경으로 내다봤고 윗집에서는 소리가 무서워서 나올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별 효과는 없었다. 그 때 5층에 살던 아주머니가 상남장에 가면 용한 침쟁이가 있다고 그곳에 가보라고 권했다. 굿까지 했는데 더 뭘 못하겠는가 하는 심정으로 그 곳을 찾아갔다.

내 인기척에 할머니 한 분이 어기적거리며 앉은걸음으로 작은 마루로 나왔다. 내가 주저리주저리 설명을 했지만 듣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옆에 놓인 깡통을 열었다. 엉거주춤 아이를 업고 서 있는 내게 아이를 내려놓으라고 했다. 아무 말도 없이 아이를 자기 무릎 위에 엎어놓고 통에서 꺼낸 마른 쑥을 돌돌 콩알만큼 말아 아이 양쪽 엉덩이 위쪽에 올려놓고 불을 붙였다. 울고 있던 아이는 숨넘어갈 듯 자지러졌고 쑥은 발갛게 타들어갔다. 그 순간 나는 너무 놀라 아이를 낚아채지도 못하고 부들부들 떨기만 했던 것 같다. ‘아니 이럴 수가, 이렇게 무식하게 아이를 잡다니. 뼈만 남아 앙상한 아이에게, 저 여린 살갗에 쑥뜸이라니’ 기절하기 일보 직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 때 그 노파에게 돈을 줬는지 안 줬는지 모르겠다. 너무 놀라서 아이를 어떻게 업고 왔는지도 기억이 안 난다. 그런데 차츰 아이가 좋아졌다. 그 이유는 지금까지도 모른다. 소아과? 한의원? 굿? 쑥뜸? 자연치유? 내 눈물? 어찌됐던 그 후 아이는 사람이 됐다. 몸이 자랄수록 흉터가 커졌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창원시 초창기에 살던 내 인생도 초창기였고 그래서 많이 미숙했고 성장통을 겪었던 것 같다. 차츰 창원도 발전했고 내 인생도 자리를 잡아갔다. 이제 창원시도 나도 옛 모습은 자꾸 사라져 가고 있다. 그러나 내 기억 속에서는 창원의 예전 모습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공원으로 탈바꿈한 이곳저곳의 옛 동네, 고층 아파트가 세워진 미나리 밭. 화려한 상가지대가 된 논과 밭. 지금 창원은 인구 백만이 넘는 특례시가 됐고 세계적으로 훌륭한 대도시로 발전했다. 그렇게 애를 먹이던 딸도 그럭저럭 잘 성장했다. 딸은 지금 미국에 살면서 경상도 말투와 창원 출생임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창원산단50년기념 책 발간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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