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써야 할 우리나라 보건의료 정책방향
사마귀제거술, 레이저로 치료할 경우 3만 6천 원, 무릎 인공관절 치환술 32만 원, 맹장염 수술도 32만 원. 슈퍼마켓에 상품진열대에 완숙 토마토 1Kg에 7천 원, 한우 등심 300gm에 4만 원, 햇감자 1Kg에 7천 원 하듯 우리 몸의 각 부분의 문제가 생긴 것을 치료하는데 비용을 메기고 서비스를 받는 것이 적절한 것일까? 건강보험이 도입되면서 의료현장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의료의 행위, 재료, 장비, 약제들은 세분화되어 사용에 따른 수가체계로 분류되어 건강보험진료비용 청구와 지불에 사용되어 오고 있다.
의료는 상품화, 상업화 그리고 산업화하여가고 있고 그 거대한 흐름은 누구도 거스를 수 없어 보인다. 여기에 환자의 심적 가녀린 떨림은 표현될 길을 잃고 난제를 만난 의사의 고뇌도 차디찬 시선들에 자신을 감추기 위한 냉철함과 강인함으로 포장되고 수많은 환자의 대기 줄과 현장의 아우성 속에 그림자처럼 발바닥에 밟힐 뿐이다.
얼마 전까지도 세계 최고의 의료서비스라 자랑하던 우리나라 의료는 한순간에 무너져 내려버리는 듯해 보였다. 중환자들을 위해 서 있을 의료진이 있을지 염려해야 하고, 환자를 받아줄 중증 외상 센터를 찾아 헤매는 구급차 안의 구급요원의 고독한 싸움이 어두운 밤하늘을 가르고 있었다. 도대체 우리나라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이전의 글에서 나는 의료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우리나라 사회에 던졌다.
당시 나는 의료가 지닌 내재적 속성들로 환자의, 의료진의, 의료시스템의 불확실성과 다양성, 그리고 사람의 한계, 진료의 확률적 가능성에 입각한 접근, 경험적 치료의 한계 등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영국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새로운 의료서비스 체계를 수립하였다. 국가가 공공의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그 근간을 이루는 체계인 국민보건서비스 (NHS:National Health Service)이다. NHS의 철학적 기초를 세운 사람은 런던 정경대학교(LSE)의 Richard Titmuss 교수였다.
티트머스 교수는 미국의 의료제도에 반하여 신뢰와 이타주의에 기초한 보편적 의료 복지 서비스의 중요성을 주창하였다. 그의 저서 중 하나인 '기증 관계성(the Gift Relationship)'이라는 저서에서 이타주의와 사회 정책의 영국식 무상 헌혈 시스템이 미국식 상업적 혈액 거래 시스템보다 공공성, 효율성, 신뢰성, 건강의 질 측면에서 우수하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복지 정책이 소득과 계급에 관계없이 모든 국민에게 제공되어야 하는 공동 선(common good)이라 주장하며, 사회적 연대(social solidarity)를 강조하며 전후 영국 사회의 복지 정책에 큰 영향을 미쳤다.
티트머스는 의료를 단순히 시장에서 사고파는 상품으로 볼 수 없으며, 그 내재적인 특성 때문에 특별한 사회적 원칙과 제도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는 의료의 불확실성과 정보의 비대칭성, 결과의 불확실성을 지적하며 질병의 진행 양상, 치료 효과, 부작용 등은 환자 개개인마다 다르게 나타날 수 있으며, 아무리 숙련된 의료진이라 할지라도 모든 결과를 100% 예측하거나 통제할 수 없다는 의료의 특성을 언급하며 의료가 지닌 본질적 예측 불가능성을 지적하였다. 또한 공급의 비탄력성을 언급하며 의료 서비스는 수요에 따라 즉각적으로 공급량을 늘리기 어려운 바 의사, 간호사 등의 의료인력의 양성에는 오랜 시간과 투자가 필요하며, 의료 장비나 시설 역시 단기간에 확충하기 어렵다는 점을 지적하고 이러한 공급의 비탄력성은 위기 상황에서 의료 시스템의 취약성을 가중시킬 수 있음을 지적하였다.
티트머스는 이러한 불확실성과 비대칭성이 존재하는 의료에 시장 원리(상업화)가 개입하면 사회적 비용이 증가하고, 신뢰가 훼손되며, 윤리적 문제가 발생한다고 보았다. 환자나 사회가 의료진에게 완벽성을 요구하고 법적 소송의 위협이 커지면, 의료진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불필요한 검사를 남발하거나 과도한 치료를 시도하는 '방어 진료'를 하게 되어 불필요한 의료비 증가로 이어지고, 환자에게도 불필요한 부담과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 또한 의료 과오나 예상치 못한 결과 발생 시, 비난과 처벌을 피하기 위해 정보를 숨기거나 은폐하려는 유인이 생긴다. 이는 학습의 기회를 박탈하고, 투명성을 저해하며, 궁극적으로 미래의 의료 서비스의 질을 저하시킨다.
이러한 의료의 본질적 특성을 잘 이해하여 시장 논리보다는 신뢰를 기반으로 한 관계 형성과, 이타주의에 입각한 공공 시스템에 기반을 둔 영국의 공공의료 시스템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상업적 관계성보다 의료진은 환자의 최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고, 환자는 의료진의 전문성과 성실성을 믿는 관계가 중요하다는 것을 보았다. 시스템적으로도 의료 과오나 문제 발생 시 개인을 비난하고 처벌하는 방식보다는, 시스템의 문제로 인식하고 이를 개선하려는 노력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는데, 이것이 진정한 professionalism이다. 뉴질랜드나 영국의 NHS 사례에서처럼, 개인의 과실 여부를 따지기 전에 시스템적 보상과 개선을 통해 의료진이 소신 진료를 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의료진의 심리적 부담을 덜고, 의료 현장에서 투명성을 높이며, 궁극적으로 환자 안전을 증진하는 길이다. 이러한 티트머스 교수의 사상은 그의 LSE 후임 교수인 Le Grand교수의 “기사, 졸, 악당”의 은유를 통해 더 발전되어 영국 보건정책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에 대해서는 이전의 나의 글에서 일정 부분 다루었다.
요약하면 의료는 예측 가능하지 않으며, ‘상품’이 아니다. 티트머스는 의료를 일반 소비재처럼 표준화할 수 없는 본질적으로 불확실한 서비스로 보았다. 의료는 복잡한 인체와 질병, 그리고 개별적 상황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며, 환자마다 같은 치료에 대한 반응도 다르다. 이런 특성 때문에 의료는 자동차 수리처럼 “결과 보장형 서비스”가 될 수 없고, 확률적·불확실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특히 생명과 건강이 상품처럼 거래되어선 안 된다고 강조하였다.
[추가로 쓰는 글]
어기까지 읽은 분들께서는 영국의 의료시스템의 한계를 들어, 왜 영국 의료시스템을 이상적인 것처럼 이야기하냐고 의아해하실 수 있다. 내가 언급하고자 하는 것은 영국의 시스템 그대로 따라가자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의료의 본질을 이해하고 이를 반영한 의료시스템을 수정할 때가 이르렀기 때문이다. 영국의 반대쪽에 있는 시스템을 가진 나라 미국의 의료를 선망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는데, 최첨단의 양질의 의료를 제공하고 있는 것 같지만 천문학적인 의료비와 의료보험의 사각지대에 놓인 국민들은 애써 외면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그동안 비용과 의료의 질, 서비스 접근성을 모두 잡은 의료시스템이라고 자부해 왔으나 안으로 곪아 왔던 문제는 지난 수년간 폭발해 버리고 말았다. 이제 우리 후대에게 물려줄 차세대 의료시스템의 방향을 설계하고 연구하고 한 단계 한 단계 실행에 옮겨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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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연관된 기사 등
https://www.docdocdoc.co.kr/news/articleView.html?idxno=30313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