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평원에 들어가면서 건강보험의사가 되기 시작한 것은 2002년 7월의 일이었다. 당시 심사위원들의 연령층이 상당히 높았기 때문에 40대 초반에 대학병원 조교수 출신의 임상의사가 전임 상근위원으로 근무한 것은 당시 분위기로는 매우 드문 일이었다는 것을 나는 들어가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당시 내과분야 심사담당 (지금은 팀장이지만 당시는 차장이라 불렀다.) P차장께서 자문의뢰서를 가지고 내 옆에 앉아 브리핑을 하러 왔는데 안건은 말하지 않고 나를 쳐다보며 "여기에 어떻게 오시게 되었나요?"라며 매우 궁금한 듯 물어보았다. 당시엔 그런 분위기였다.
심평원 업무를 숙지해 가면서도 나는 임상에서 환자를 보던 중 심평원으로 인해 막혔던 부분들에 대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생각은 지울 수 없었다. 가장 부딪쳤던 부분이 '식약처 허가사항 외 의약품사용'에 관한 것이었기에 이 문제가 왜 발생한 것인지 매우 궁금해하던 터였다. 교과서나 심지어 국제적으로도 존중받는 유수한 임상진료지침에서 권고하는 치료도 '허가 외 사용'이란 허들에 걸려 보험급여가 되지 못하면 의사는 환자를 치료할 길이 없게 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한 번은 다제내성 결핵균에 허가사항 외 사용에 대한 심의에서 허락하지 않는 결정을 내리는 과정을 지켜보며 나는 "대법원에서 사용하지 말라고 해도 호흡기전문의라면 처방할 겁니다!"라고 외쳤다.
또 다른 일례로 아스피린이 고위험군에서 심혈관질환의 예방에 효과적이란 것은 이미 여러 다국가 다기관 무작위임상시험을 통해 매우 잘 알려졌고 교과서와 임상진료지침 모두 공히 사용을 강하게 권고하였으나 당시 식약처 허가사항에 아스피린은 통증과 관절염에만 효능효과를 허가받았기 때문에 심혈관고위험군 환자에서 예방적 치료로 사용되는 경우에 청구된 경우는 인정되지 않았다. 의사들은 의학적 표준에 따라 진료하였지만 몇십 원 되지 않는 이 약이 인정되지 않으니 도저히 납득하지 못할 만 한데 제도가 그렇게 되어 있었다. 이 문제는 아스피린 프로텍트라는 동일 성분의 약제가 심혈관제제에 적응증을 받고 용량을 맞게 제형을 바꾸어 출시된 후에야 이 상병에 사용할 수 있게 되었는데 약값이 전체적으로 저렴하긴 하였지만 기존 동일한 성분에 비해 더 비쌌다.
답답함을 금치 못한 나는 외국의 사례들에 대해 찾아보고 연구해 보면서 점차 문제의 윤곽이 내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OLDU(off-label drug use)란 용어가 이미 의학계에서는 사용되고 있었고 미국 FDA의 규제, 인허가 기관의 역할과 실재 의료현장에서 사용되는 것, 그리고 공적 혹은 사보험에서 급여되는 문제 이런 범주들에 대한 개념이 잡히기 시작하였다. 이때 고민했던 내용들은 추후 대한의사협회지 시론에 2018년 게재한 바 있다.
외국에서는 FDA 같은 인허가 기관의 역할은 시장에 진입해도 되는지에 대한 신호등 역할을 하며 시장에 출시될 약의 라벨 즉 약의 설명서에 들어갈 문구에 대해 인가를 해주는 기능이 강하고 일단 출시되어 시장에 진입하면 의료진은 의학적 지식에 따라 해당 약제를 사용하는 것에 제한받지 않았다. 급여도 미국의 경우 공적 보장체계에서는 당시에는 동료심사가 이루어진 의학 학술지에 두 편 이상 게재된 근거가 있으면 수용되었고 이후 이는 공인된 의약품집에 수록된 경우 인정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복지부장관 고시로 허가 외 사용이 가능하나 이를 인정하는 것이 쉽지 않아 현장의 의학적 필요를 반영해주지 못한다는 많은 호소를 들어야 했고 반면 허락한 경우 국회에서는 왜 심평원에서 식약처의 허가 업무를 침해하냐는 질타를 받는 일이 잦았으므로 난항을 겪는 문제였다.
안면이 있는 복지부 공무원들에게는 이와 관련된 문제를 정리해서 공유하며 문제의 해결에 관해 관심을 갖도록 권하였으나 당시 중앙부처 행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국가의 의료 관련 시스템이 어떻게 방향이 결정되고 집행되는지 현장감이 없던 나의 의견 피력은 그들의 눈에는 어설픈 전문가 한 사람의 의견에 불과하였으리라.
그러던 어느 날 우연찮게 일의 실마리가 풀릴 기회가 찾아왔다. 허가 외 의약품사용에 관해 가장 힘들어하는 의료영역은 암질환과 소아과 산부인과 영역이었다. 암질환의 경우 한두 가지 암에서 그 효능(efficacy)이 입증되어 의약품이 시장에 진입하면 유사한 메커니즘을 발휘할 수 있는 영역으로 신속히 사용이 확 돼 되는 경향이 어느 질환군 보다 빨랐고 소아과나 산모, 수유 중인 여성에게는 임상시험의 기회가 매우 적음으로 이들을 대상으로 한 데이터가 없어 빈번하게 이들에게 안전성 유효성이 입증되지 않았다는 꼬리표가 붙기 마련이고 이는 허가 외 투약으로 인식되곤 하였다. 이중 암질환을 치료하는 의사들이 제일 먼저 조직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하였고 "암중모색"이란 사회소통 프로그램 중에 항암제 사용의 비의학적 제한을 풀어줄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그러던 중 담당 H사무관이 심평원 각 부서와 돌아가며 허가 외 의약품사용 관련 의견을 청취하였는데 마지막으로 내가 소속된 위원회와 함께 하였다. 그때 나는 이 문제에 대해 계속 관심을 가져왔고 문제의 근원과 해외사례들에 대해 연구를 해놓은 상태였음으로 내 생각을 자연스럽게 전할 수 있었다. 그 후 얼마 안 돼 H사무관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는데 항암제 관련 허가 외 사용에 대해 심의할 위원회를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당시 그 의견 청취자리에서 처음 만난 나에게 이런 부탁의 말을 듣다니 나는 무척 당황스러웠으나 속으로 무척이나 기뻤는데 드디어 제도적으로 허가 외 사용의 길이 열릴 수 있겠구나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의 역할이 자문에 속하였고 계선조직에 있지 않았던 내가 위원회 구성을 조직화하는 일을 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으므로 당시 관련 부장이었던 K부장을 도와 안을 만들어 보겠다고 답변을 하였다.
나는 이때 우리나라 중앙 부처 공무원들이 얼마나 열심히 일을 하며 본인이 확신을 갖게 되면 민첩하고 추진력이 있게 일을 해나가는지 보게 되었고 그 이후로 중앙부처 공무원들을 존중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으며 이들이 국가를 위해 매우 중요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 항암제에 대해서 이때부터 허가 외 의약품 사용의 체계적인 시스템이 생기게 되었다. 항암제 이외의 약들에 대해서는 IRB심의를 받아 비급여로 사용할 수 있는 제도가 마련되었는데 후자의 제도가 마련되는 데에는 나는 직접 관여할 기회는 없었다. 물론 이 두 제도로 허가 외 의약품투여의 문제가 다 해결된 것은 아니었으나 적어도 제도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길의 숨통을 터 놓은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제도적 보완을 위해 의사협회지에 2018년 첨부와 같은 글을 게재하였다.
다음은 이 시론에 게재했던 글의 일부를 주요 부분을 인용하였다.
"의약품 허가초과사용이 발생하는 이유: 규제기관의 인허가를 위한 임상연구를 계획할 때, 일반적으로 신약이 해당 환자군에 유효한 작용을 할 수 있을지를 알아보기 위해 효과를 가장 잘 나타내 보일 수 있고 위해는 위해는 가장 적게 나타날 수 있는 환자군을 대상으로 이상적 환경 하에 임상시험을 하도록 설계하게 된다. 이를 위해서 임상시험에 포함할 군과 배제할 군을 명시하며 임상연구 과정 또한 엄격하게 관리하여 진행하게 되고 이러한 이상적 환경 하에 얻어진 결과를 효능이라고 부른다. 일반적으로는 중증의 환자나 동반질환이 있는 환자들, 소아, 임산부, 고 연령층 등의 경우 배제 대상에 들어가게 되고 제한된 포함기준에 있는 환자들에 대해서만 사용가능하도록 라벨에 구체적으로 명시될 경우 그 외의 경우는 허가초과 대상이 되게 되는 것이다. 미국에서 보고된 연구에서는 소아과의 경우 퇴원 환자의 79%가량이 한 가지 이상의 허가초과 의약품을 처방받았고, 프랑스의 연구에서는 소아과 외래에서 한 가지 이상 허가초과 의약품을 처방받은 예는 56%에 달한다는 보고가 있었다. 영국에서 연구된 보고에 따르면 산부인과 영역에서는 약제 종류로 볼 때 산모에게 처방된 약제 중 83%의 약제들이 허가초과나 임산부에 사용주의 또는 금기인 약제들이었고 1%에서는 허가되지 않은 약제의 사용되었다. 미국의 경우에 대한 보고이긴 하지만 전체 약물처방의 21% 정도가 허가초과사용인 것에 비해 소아과 영역과 산과 영역의 환자에 허가초과사용률이 높은 것은 일반적으로 임상연구 당시 배제대상이 되는 것을 고려해 보면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의약품 안전과 허가초과사용: 다양한 임상 분야에서 의약품의 허가초과사용이 필요하고 환자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은 틀림없지만 과학적 근거에 의해 지지되는 사용은 30% 정도에 불과하며, 근거가 부족한 상태에서 사용되는 비율은 특히 정신과, 감염병, 고혈압 및 알레르기질환에서 높다는 보고가 있다. 캐나다에서 이루어진 4만 6천21명의 환자에서 처방된 151,305개 약제들에 대한 분석을 보면 11.8%인 17,847건의 허가초과사용이 있었고 허가초과건 중에 19% 정도가 강한 과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처방된 경우였다. 이 연구에서 총 3,484건의 약물이상사례가 발생하였는데 허가사항 내 사용의 경우보다 근거가 부족한 허가초과사용의 경우 1.7배 정도 약물이상사례 발생이 높았으나 과학적 근거가 있어 사용한 의약품 허가 외 사용의 경우는 허가내사용과 차이가 없었다. 이 연구에서 사용된 ‘강한 근거’는 허가초과사용에 효과가 있고, 허가초과사용의 적응증이 되는 환자들 대부분에게 권고되며, 최소한 하나 이상의 무작위대조군임상시험에서 효능이 있는 경우로 정의하였다. 이 연구결과를 통하여 볼 때 의학적 근거가 일정 수준 이상인 경우는 허가 내 사용과 안전성 측면에서 차이가 없음으로 해당의약품이 주는 이득이 크다면 다른 제한 없이 의료현장에서 사용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
"외국의 사례
의약품의 규제 정책의 국제적 표준을 제시하는 미국의 사례를 보면 의약품의 허가초과사용은 불법적이지 않으며, FDA는 임상연구목적으로 사용 시 피시험자 보호 측면에서 엄격한 평가를 요구하나 일상적인 임상에서 허가초과사용에 대해 규제하지 않고 있다. 즉 허가초과사용이 의학적 판단의 문제라는 관점을 갖고 있다. 다만 제약회사가 허가초과사용에 대해 홍보할 수 없도록 규제하고 있다. 메이요 클리닉의 Wittich 등은 의약품 허가초과사용이 의학적 표준에 맞는 것인지 점검을 위해 해당 의약품 자체는 규제기관의 허가는 통과한 것인지, 허가초과사용이 동료심사를 거친 것인지, 치료에 의학적으로 필요한 것인지, 그리고 실험적인 것은 아닌지에 대한 질문을 던져볼 것을 권하고 있다. 메디케어는 암질환에 사용되는 약제의 경우 1993년 미의회는 법에 명시된 약품 전 중 하나에 명시된 경우나 두 편 이상의 동료심사 학술지에서 사용을 지지하는 경우에 급여할 수 있도록 법제화하였다. 법에 명시된 약품전은 ‘American Hospital Formulary Service-Drug Information’를 포함한 세 가지였는데 메디케어가 적절한 의약품전 목록을 승인하도록 권한을 부여받아 최근 세 가지가 더 추가되었다. 상기 약품전에 없는 경우는 2008년 기준으로 26개의 동료심사가 이루어지는 학술지에 게재된 경우 급여를 고려할 수 있도록 하였다."
"감안하여 허가초과의약품사용의 이득과 해로움을 고려하여 다음과 같은 근거에 기반한 급여 인정의 일반 원칙을 다음 첫째와 둘째 항을 모두 만족하는 경우로 제안한다.
첫째로, 효능, 효과를 입증할 의학적 근거가 있어야 한다(다음 중 한 가지 이상 만족할 경우). 양질의 무작위대조군임상시험 결과 2편 이상에서 위해를 상회하는 이득이 증명된 경우, 두 편 이상의 양질의 전향적 코호트연구들에서 일관적이며 효과의 크기가 중등도 이상이라고 판단될 경우, 여러 편의 양질의 관찰적 연구에서 효과의 크기가 매우 크며 일관성이 있는 경우(1-3항에서 각 항의 해당 연구문헌이 2편만 존재할 경우, 모두 해당 의약품과 이해관계가 없는 연구이어야 하며 연구문헌의 질과 효과의 크기에 대한 판단은 임상진료지침 제작의 국제표준을 제시하였으며 의학계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GRADE [the Grading of Recommendations Assessment, Development and Evaluation]의 지침을 따를 수 있다).
둘째로, 의학적 표준으로 인정되어야 하며 교과서, 임상진료지침, 및 동료심사 학술지의 종설에서 일관성 있게 권고되는 경우를 의학적 표준으로 간주할 수 있다.
상기 기준이 충족된다면 일반적으로 모든 요양기관에서 해당의약품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하고 추후 건강보험 및 제약사 등의 다양한 재원으로부터 임상연구기금을 조성하여 불확실성이 존재하는 의약품에 대한 레지스트리를 구축하여 근거창출조건부급여의 형태로 한시적으로 사용하고 일정기간 경과한 후 재평가하는 기전을 구축할 것을 제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