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복음서에 보면 다양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들이 나온다. 그런데 각 사람을 대하시는 예수님의 접근 방식과 말씀이 다 다른 것을 볼 수 있다. 매번 사람을 대하실 때 각 사람의 상황이 다른 만큼 대하시는 것도 일률적이지 않으셨다.
한 때 의료시설에 접근하기 수월치 않던 시절, 연로하신 어떤 분에게는 붙이는 파스가 만병통치약이었다. 무릎 아프면 무릎에, 배 아프면 배꼽에, 머리 아프면 이마에 파스를 붙이곤 하시면서 다른 이들에게도 당차게 추천하시곤 하셨고 한다. 나도 들은 말이니 진위는 알 길이 없는데 자신이 효험이 있다고 체험한 것을 자신 있게 모든 것에 적용하니 위약(placebo)의 효과 정도는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우스운 원칙이 사실상 사회생활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아이들을 키울 때 우린 각 자녀들의 다른 특성을 고려하여 대하였는가? 용한 과외선생님, 학원 선생님 소문을 듣고 그대로 아이들에게 강요하다시피 요구하지 않았던가? 부부간에 대할 때도 상대를 살피고 그의 상황을 고려나 하였던가? 내 생각에 옳은 대로 요구하고 판단하고 심지어 다투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학교 생활에서, 직장 생활에서, 가정생활, 심지어 종교생활에서 우린 자신이 들어오고 배워오고 체험하여 형성된 관념의 잣대로 사람들을 측량하고 정의하고 심판하기까지 하며 자신만의 특효약 '파스'를 강요하지 않았던가?
다른 이는 병들었을 때 찾아가셨으나 나사로는 죽고 장사 지난 다음에야 찾아가셨다. 우린 누이 마르다와 같이 병들었을 때 주께서 오셨어야 문제가 해결될 수 있었다고 생각하겠지만 주님은 그 사람에게 가장 적합한 때에 적합한 방식으로 가신다. 어떤 눈먼 이는 다만 말씀하심으로 눈을 뜨게 하셨지만 어떤 눈먼 이에게는 흙을 침으로 이겨 눈에 발라주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셨다.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베드로에겐 나를 따르라 하셨으나 요한은 머무르게 두셨다.
요한복음 21:19-22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할 것인지를 알리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나를 따라오십시오.”라고 말씀하셨다. 베드로가 돌아서서 보니,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그 제자가 따라오고 있었는데, 그는 저녁 식사 자리에서 예수님의 가슴에 기댄 채 “주님, 주님을 배반할 사람이 누구입니까?”라고 여쭈던 사람이었다.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님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라고 하니,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남아 있게 하고자 한들, 그것이 그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대는 나를 따라오십시오.”
모든 것을 규정화하고 일률적이길 요구할 때 이미 우린 틀에 박힌 종교적인 사람이 된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살아계신 주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로, 생명으로, 생수로 생명의 떡으로, 모든 필요로 받아들이는 것이, 성령을 따라 사는 것이 어찌 종교라 하겠는가? 생생하게 살아나가는 생활, 삶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