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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무 Apr 13. 2022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을 가린다

글: 이상무, 그림: 이가은

 글을 쓰는 것은 조각하는 것과 같다.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의 실체를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언어로 조각을 한다. 이 표현을 해 보고, 또 한참이 지나 떠오른 저 생각을 적어본다. 이  글을  더해보고 저글은 빼보기도 하고 다른 표현으로 바꾸어 본다.  그러면서 점차 그 사유의 실체의 윤곽이 드러나독자가 알아볼 수 있는 어떤 형태로 나타내어진다. 하지만 그렇게 글을 써도 아내에게 읽어 보라고 하면 무얼 말하고 싶은 거냐는 핀잔을 듣기도 한다.


 이런 생각을 한 사람이 있을까 하고 구글링을 해보니 이미 독일의 노벨상 수상작가 귄터 그라스(Gunter Grass, 1927-2015)가 글쓰기는 조각과 같다는 이야기 한 것을 발견하였다. 양철북의 저자 말이다. 그는 실재 조각가이자 작가였다고 하니 더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내가 사유하는 어떤 것을 글로 표현하는 과정은 글을  읽는 들과는 소통의 과정이고 이 과정에서 내 생각에 떠 오른, 내게 깨달음이 된 그 실체를 전달하려면 나는 언어로 섬세한 조각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글을 읽는 사람이 알아볼 수 있을 때까지.


 오늘 조각 작품을 선보이고 싶은 것은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을 가린다는 것'이다. 이것을 잘 표현해 낼 수 있을까? 그 참된 실재가 제시되도록 말이다.


 부부가 가정을 이루어 살다 보면 많은 현실적인 생활의 필요들로 인해 염려도 하고 불안해하기도 하며 내일의 불확실성으로 인해 흔들리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자연히 손에 잡히는 것들을 고려하게 되고 의지하게 되니 수입과 은행의 잔고에 눈이 가기 마련이고 이로 인해 수입과 직장에 대한  말들이 부부 사이에 오가기도 한다. 십오 년이 흐른 이야긴데, 당시 우리나라에서 영어와 한국어 수업이 반반 이루어지는 Y초등학교에 막내가 다닐 때였다. 늦게 막내를 얻은 턱에 학부모 모임이 있어 아내가 다녀오면 만난 아이 동급생 엄마들은 거의 다 손 아래였고 나의 아내가 거의 제일 연장자였다. 그런데 이 부모 모임, 아니 엄마들 모임만 갔다 오면 아내의 얼굴 표정은 굳어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은 엄마들이 자신들의 일상을 이야기하면서 생일선물로 남편이 BMW를 사줬다는 등의 이야기가 오간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자신의 남편인 나는 의사인데도 왜 우린 이렇게 사냐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많이 어렵고 내가 그렇게 모자라 보일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당시 나는 E병원의 내과 조교수로 의사지만 월급을 타는 봉직의였다. 그다지 후하지 않은 월급이지만 환자를 돌보는 열정으로 열심히 살며 나름 명의 소리도 들어가던 시기였다. 대부분 의사들은 자신이 명의라고 생각하니 이해하고 들어주시기 바란다. 지금은 나의 아내가 그리 생각하였던 것을 몹시 후회하고 있지만, 그렇게 열심히 살고 가족을 사랑하고 가족을 위해 살고 있던 나를 그 당시엔 한참 모자란 사람으로 보았던 것이었다.


  아이들이 갓 태어나 손과 발을 꼼지락 거리는 것을 보면 세상 근심이 없다가도 점차 아이들이 자라며 학교 생활과 성적표를 보다 보면 이 아이가 자라서 어떻게 사회생활에 잘 안착할지 염려가 쌓이게 되고, 쌓인 염려만큼 아이들에 대한 잔소리의 말수가 늘어만 가고, 늘어난 잔소리만큼 아이들은 저 멀리 물러서 가 있게 된다. 나는 아이를 위해  애가 타기도 하고 열과 성을 다해 일하기도 하지만 아이들의 마음은 점점 더 닫혀만 간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들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들입니다. 보이는 것들은 잠시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들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4:18


 그런데 이 보이는 많은 것들로 인해 보이지 않는 것들이 가려진다는 것을 깨달은 적이 있는가? 보이지 않는 생명의 귀함, 부부간의 사랑, 자녀에 대한 깊은 애정, 친구와의 우정,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정과 신뢰 같은 것 말이다.  이 보이지 않는 소중한 것들은 보이는 것들에 밀려 그 존재를 느끼지조차 못한 채 소중한 시간들이 흘러가버릴 수 있다.


 사실 우리가 보이는 것들에 연연하고 흔들리는 것은 우리가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의 모든 보이는 불완전함은 보이지 않는 완전하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기 위한 열쇠가 된다. 이것을 깨닫게 되면, 보이는 상황의 염려들로 인해 오히려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나아가게 되고 그분을 바라보게 되고, 그분께 의탁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하나님과 연결되게 된다.


 실재 성경에 그런 여인이 나온다. 남편을 둔 대부분의 여자들이 아이를 가졌으나 당시 '한나'라는 여인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그녀와 경쟁 관계에 있는 브닌나라는 여인도 남자아이를 가졌으나 유독 한나에게는 아이가 주어지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한나는 몹시 흔들렸고 고뇌하였으나 여기에서 좌절하지 않고 성전에 나아가 하나님께 절박하게 기도하였다. 그때에 제사장 엘리는 소리를 내지 않고  울며 기도하는 한나를 보고 술취한 줄 알 정도였다. 그런 엘리 제사장에게 한나는 “아닙니다, 나의 주인님. 나는 영이 짓눌린 여자입니다.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신 것이 아니라, 다만 여호와 앞에 내 혼을 쏟아 내고 있었을 따름입니다."라고 말하였는데, 이후 그녀는 당시 시대를 전환할 사무엘을 얻게 된다.

  바울은 회심 후 주님을 절대적으로 섬기었으나 살 소망을 잃을 정도의 고난을 받게 되었다. 세상을 사랑한 것도 아니고 주님을 섬기는데 왜 이런 죽을 지경의 환경이 닥친 것일까? 그가 이유를 하나님께 여쭐 때  얻은 답변은 다음과 같았다.


 형제님들, 여러분은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몰라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힘에 겹도록 극심한 압박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져, 결국은 죽게 될 것이라고 스스로 단정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자신을 신뢰하지 않고 죽은 사람들을 살리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8-9


 다시 말하거니와 우리의 모든 보이는 불완전함은 보이지 않는 완전하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기 위한 열쇠가 된다.


우리의 불완전함으로  고난 가운데 있을 때 이로 인하여 하나님께 돌이키고 그분께 나아가게 되면 우린 날아오르게 되고 발 밑의 어떤 상황도 우릴 괴롭힐 수 없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날다가도 땅에 내려온다는 것이다. 그럴 때 다시 눈에 보이는 것들로 우린 고통 안으로 떨어질 수  있다. 여러분 중 어떤 분은 어떻게 항상 날아다닐 수 있냐고 묻겠지만 알바트로스 새는 양육할 때를 제외하고는 평생을 날아다니고 심지어 하늘을 날면서 잠을 잔다. 우리가 하나님과 연결되고 하나님의 임재를 사는 한,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하나도 없다.


 오직 성경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것들은 눈으로 본 적이 없는 것들이고, 귀로도 들은 적이 없는 것들이며, 사람의 마음에 떠오른 적도 없는 것들이다.”라고 기록된 것과 같습니다. 고린도전서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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