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각에 이 땅에서 가장 많이 오해받고 있는 분이 하나님이시지 않나 싶다.심지어 믿는 이들 조차 왕왕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에 대해 하나님의 뜻을 오해하여 소위 '냉담'의 시기를 갖기도 한다.
사람들이가장 많이오해하는 몇 가지 사안들을 살펴보자.
첫째,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사람들이 볼 수 없는가? 눈에 보이지 아니하니 계시지 않은 것아닌가?
둘째,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세상에서 이렇게황당하고 고통스러운 일들이 일어난다는 말인가?
셋째,하나님이 계시다면 어떻게 악한 사람이 잘 사는 일이 벌어질수 있는가?
넷째, 믿는 이에게 왜 고난이 오는가?그것도 착한 사람에게 말이다.
일단 이 정도가 흔하게갖는 의문일 것이다. 한 가지 한 가지 들여다보도록 하자.
첫 번째 오해는 “하나님은 왜 보이지 않으시는가? 내 눈에 보이면 믿을 텐데”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 우리가 잘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눈에 보이시면'이라고 말하는 대로 하나님께서 이 땅에 나타나신 적이 있으셨다. 성경에 따르면 출애굽기 19:16-24에 “백성이 나 여호와를 보려고 경계를 넘어오다가 그들 중 많은 사람이 멸망당하지 않게 하고…. 제사장들이나 백성들은 여호와에게 올라오지 못하게 하여, 나 여호와가 그들을 치지 않도록 해야 한다.”이 장면은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이 땅에 나타나시는 장면에 대한 기록이다.
하나님께서는 의로우시고 거룩하신 분이시다. 죄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더럽혀짐에 대한 처리 없이 하나님께 나아간다면 그분의 의로우심과 거룩하심이 죄 있는 사람들을 견딜 수없으시므로 사람들은 그들의 죄로 말미암아 죽게 된다. 만약 자신의 더러움과 죄악 됨을 처리받지 않고 오늘날 하나님을 뵌다면 즉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셨던 처음부터 이와 같았는가? 아니다. 처음 아담과 하와가 지어졌을 때 그들은 하나님과 대면하여 말하였고 그들은 하나님을 알았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아셨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하였을 때그들이 무서워 스스로 하나님으로부터 숨었다.그러나 사람이 비록 타락했지만 그 이후에도 하나님께서사람들과 말씀하시고 심지어 다투기까지 하셨다.하지만거듭 타락이 심해지면서,죄악이 가득하고 육체가 되기까지 타락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그분의 영을 거두어 가신 것이다.
그 이후 이 범죄 한 사람들이 구원받을 기회를 가질 때까지 하나님께서 긍휼 가운데 참고 기다리고 계신다. 로마서 1:28은 이렇게 말한다. ”또한 그들이 자기들의 모든 지식 가운데에 하나님 두기를 거절하므로, 하나님은 그들이 인정받지 못할 생각을 하여 합당하지 않은 그 짓들을 하도록 그들을 내버려 두셨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돌이켜 죄들을 자백하고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구원을 받을 때까지 우리를 내버려 두신 것 것이다. 그러므로 타락한 우리가 하나님을 뵈려면 과정과 절차가 필요하지 않겠는가? 더럽혀진 컵에 마실 생수를 부을 수 있겠는가? 기억해두자.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나타나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하나님을 그 마음에 두길 싫어하여 하나님을 떠난 것이고, 하나님은 그들을 그대로 내버려 두신 것이다.사람이 자신의 타락을 처리하지 않은 채 '하나님 나와보시라'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얼마나 거룩하시고 의로운 분이심을 알지 못하여 하는 말이고, 자신이 불타서 즉사하겠다는 말인 것이다.
두 번째 오해는 흔하게 사람들이 하는 말이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이런 어려운 일들이 발생하는가?" 거센 역대급 태풍이 불어오고, 원전이 손상돼 바닷물이 오염되고, 코로나가 와서 집 밖에 못 나가게 되고, 전쟁이 일어나 사람이 사람을 해하고... 온갖 평화를 깨뜨리는 일들이 발생하는데 '하나님이 도대체 계시긴 하신 것이냐'라는 의구심이다.
이 문제를 다루기 전에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다. 정말 궁금한 것이다. 이 질문들은 주로 언제 하게 되는가?천재지변이나 대형 인재가 발생하였을 때이다. 이런 재난이 오기 전, 사람들은 평소 하나님에 대해 인식하고 있었는지 궁금하다. 끊임없이 햇살이 비추고, 비가 내려 대지를 적시고, 온갖 생명들로부터 좋은 식재료를 얻을 때 하나님을 관심하였는지 묻고 싶다. 평소 하나님에 대하여 관심이 없고, 심지어 어떤 이들은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두길 싫어하고, 진화론 같은 이론을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받아들이며 그들의 사고 체계에서 하나님을 배척하였던 분이왜 사람이 다룰 수 없는 대형 재난이 닥칠 때면 하늘을 원망하며 "하나님이 계시다면..."이라는 말을 하는 것인지 그것이 참으로 궁금하다. 평소 사상에 의하면 모든 것이 우연히 존재하고 자신도 미생물로부터 수많은 세월이 흐른 가운데 우연과 우연이 연속적으로 그것도 합목적적으로 기이하게도 발생하여 오늘의 내가 되었다고 생각하실 텐데, 그렇다면 이런 재난이 닥칠 때 하나님이 계신지 안계신지 의문이 생기지 않으실 것 같은데 말이다.모든 것이 우연이고 자연적으로 일어난 것일 테니 말이다. 그러나 이런 분이라도 재난이 닥쳤을 때 "하나님이 계시다면..."이란 질문을 던지시는 것에 대해 힐난하지 않겠다. 하나님을 알아갈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으니 좋은 일이라 생각하며 답변을 드리도록 하겠다.
먼저 '하나님께서 이 땅을 이런 재난들로 사람이나 이 땅에 시련을 주시는 것이 불의한 일일까?'에 대해 생각해보자. 이에 대한 숙의를 위해 지구 역사에 있었던 한 사건을 끄집어내어 테이블위에 올려보자. 이 문제를 살펴보기 위하여 노아 때의 홍수를 소환해 보겠다. 오늘날 사람의 눈에 볼 때 어떤 재앙도 노아의 홍수와 같지 않았다. 노아의 홍수에 대한 역사적 고증은 성경뿐 아니라 여러 민족들에게 구전되어 온 이야기들을 통해서도 발견된다고 한다.
창조 이래로 노아의 홍수만 한 재앙을 겪어 본 적이 없었으니 노아의 홍수가 이해된다면 다른 재난들은 이해 못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인류의 첫 세대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치 않음으로 타락하게 되었다. 그다음 세대인 가인은 살인하고 거짓말을 함으로 더욱 죄 가운데 있게 되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그이후 더욱 타락하여 육체가 되었다. 이때의상태를성경은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사악이 세상에 가득한 것과 그가 마음에 생각하는 것마다 계속해서 악하기만 한 것을 보시고, 땅에 사람을 만드신 것을 후회하시며 마음에서 슬퍼하셨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창조한 사람을 이 지면에서 쓸어버리겠다. 사람부터 짐승과 기어 다니는 것과 하늘의 새까지 쓸어버리겠다. 왜냐하면 내가 그것들을 만든 것이 후회스럽기 때문이다." (창세기 6: 5-7)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지만 사람의 부패함이 심할 때, 물로 심판하신 것을 볼 수 있다. 대홍수를 보고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의구심을 갖기 전에 사람이 자신들의 상태를 먼저 돌이켜 보아야 한다. 홍수 이전 사람의 상태가 어떠했는지에 대한 자성이 앞서야 한다. 그리고 노아의 때 구원받은 노아와 그 온 가족들과 그와 함께한 온갖 동물들을 기억해 두어야 한다. 사람의 악함으로 심판이 임하지만 하나님 앞에 은혜를 입게 될 때, 피할 길도 주어지기 때문이다. 장차 온 땅은 하나님의 심판의 집행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노아의 때는 물로 심판하셨지만 장차 올 심판 때에는 하늘과 땅은 불살라질 것이다. 그분의 심판을 부분적으로 앞당긴다고 해서 그분이 불의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분은 사람들이 멸망당하지 않고 구원받을 기회를 주시기 위해 오래 참고 계신 것이다 (베드로 후서 3:7-9).
셋째 오해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어떻게 악한 사람이 잘 사는 일이 벌어지는가?"이다.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역시 먼저 살펴볼 사안이 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세가 모든 것인가?' 그리고 '현세는 완전한 세상인가?' 이 현세가 모든 것이고 여기서의 결과가 끝이고, 그 이후의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린 필사적으로 이 시대에 잘잘못을 따지고, 악을 철저히 응징하고 선하게 산 사람들에게 보답이 돌아가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전 '임사체험'글에서 언급한 것처럼 우리 인생은 이생에 종결되고 그 이후 아무것도 없게 되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악한 사람이 잘 되는지에 대한 질문을 한 사람이 성경에서도 나온다. 그는 이문제로 인하여 심지어 크게 실족할 뻔하였다. 시편 73편에서 그는 악인들이 잘되고, 거만한 이들이 부러워할만한 상상에 이르고, 죽을 때도 편하게 죽으며, 역경도 겪지 않고, 재앙도 당하지 않고, 물질적으로 부하게 되는 것을 보고서 이 사람도몹시 괴로워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서야 그들의 종말을 깨달아 알게 되었는데 그 악인들이 파멸에 이르고, 순식간에 황폐케 되는 결말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니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너무 노여워하며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게야'하고 오해하지 마시기 바란다. 실제로 악한자가 이 현세대에 잘 못될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질지도 고려해보아야 할 일이다. 악한 자가 지지리도 못살게 된다면 그가 선한 사람들에게 어떻게 행할 것인지도 살펴보아야 한다. 이 불완전한 세상에서 죽을 때까지 이 지구를 같이 사용해야 하는데 말이다. 이 말은 우리가 선한 사람을 괴롭히지 못하도록 악한 일을 저지른 사람을 잘 살게 도와주자는 말이 아니다. 법적 체계하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은 마땅히 국가가 정한 법적 체계에 따라 징벌을 받아야 마땅하다. 여기서 말하는 악한 사람이란 도덕 상태를 말하는 것이고 본성이 좋지 못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이제 네 번째 오해에 대하여 보기로 하자.왜 믿는 이에게 고난이 오는가?이에 대한 답변을 하려면 역시 먼저 물어보아야 할 것이 있다. '하나님께서 믿는 이들에게 주시기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것과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말 사람들에게 좋은 것인가?'라는 질문이다.사람마다 다 생각이 다를 수 있으나 일반적인 생각에 대해 말할 수밖에 없으니, 생각이 다르신 분이 있으시더라도 양해해주시기 바란다. 보통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건강과 재물과 자손이 잘되는 축복을 주신다고 기대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순종하면 이런 물질적인 영역의 축복이 임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가슴이 아리더라도 성경에 말씀하시는 참된 것을 보도록 하자.
여러분 중에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습니까? 또 아들이 달걀을 달라는데, 전갈을 주겠습니까?누가복음11:11-12
마태복음 7:9-12에서도 이 구절에 해당하는 기술이 있다. 마태복음에서는 이와 유사한 말씀을 하신 후 "여러분이 악할지라도 좋은 선물을 자녀에게 줄 줄 아는데, 하물며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구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것들을 주지 않으시겠습니까?"라고 말한다. 내게는 이 구절들을 이해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들은 생선과 계란을 달라고 아버지에게 구한다. 이것은 일상의 필요이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이 땅에서 의 필요를 아버지께 구한 것이다. 그런데 다음 구절이 내게는 영 어색했고 어울리지 않는 문장처럼 보였다. '뱀'과 '전갈'을 왜 언급하신 것일까? 적어도 생선과 계란과 견줄 정도의 그러나 다소 품질이 떨어지는 무언가를 언급하셨다면, 아 그렇구나 자녀가 그 필요를 구하는데 덜떨어진 것을 주시겠는가 좋은 것을 주시겠지 하고 이해할 텐데 '뱀과 전갈을 주시겠는가'라니 이것은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체험이 쌓이고 앞선 신실한 믿는 이들의 글을 읽으며 깨닫게 되었다. 우린 우리의 필요를 따라 하나님께 구하였는데 우리 앞에 온 것은 '뱀과 전갈'과 같은 환경이 왔다는 것이다. 우리가 보기에, 우리 눈에는 말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미리 이 말씀을 하신 것이다. '이 땅의 부모들도 그리하지 않는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그리하시겠는가'라고 하시면서 우리 눈에 보이는 그 뱀 같고 전갈 같이 우릴 물고 쏘는 아픈 환경이 결코 우리 안목에 보이는 대로 우릴 해치고자 하는 환경이 아니라는 것을 미리 알려주신 것이다. 이런 고통스러운 환경이 올 때 우린 더욱 돌이켜 하나님께 나가고 하나님 만을 의뢰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렇게 우리 속 깊은 곳에서부터 하나님을 앙망하고 하나님께 열어 드릴 때, 비로소 하나님과의 관계가 형성되게 되고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것, 하나님께 속한 모든 풍성을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태복음에서는 '좋은 것'을 주시지 않으시겠냐고 하였고 누가복음에서는 '성령을 주시지 않으시겠냐'라고 하신 것이다.
이 땅에 사는 동안, 우리가 육신을 입고 사는 한 우리에게는 많은 물질적인 필요가 있고 돌봄이 필요하다. 이런 필요를 채우는 것은, 우리가 볼 때 절대적인 것이고 이러한 필요가 안정적으로 그리고 미래에도 보장되는 것처럼 보일 때 우린 축복받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된다 할지라도 우리의 존재가 흙에 속한 타고난 그대로 있다가 죽게 되면 우리의 존재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자들로 발견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 눈에 뱀과 전갈들처럼 보이는 환경들을 때로는 보내시는 것이다.
벧전 1:6-7 여러분이 여러 가지 시련 때문에 현재는 잠시 동안 슬퍼하지 않을 수 없겠지만. 그때를 두고 크게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의 믿음의 시련은 불로 단련해도 없어지고 말 금의 시련보다 훨씬 더 보배로워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처럼 결국 시련은 용광로에서 금광석을 제련하듯, 금이 아닌 성분들은 제하고 금에 속한 것만 남길 것이고 열과 압력이 흙을 돌로, 돌을 보석으로 변화시킬 것이므로 이것이 아버지께서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는 내재적인 의미인 것이다.
이상으로 하나님을 오해하는 주된 사안에 대해 나름대로의 관점을 제시하였다. 하나님께서 빛을 주시고 볼 수 있는 시력을 허락하셔서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에게 하나님을 알려주시길 원한다.
이 글을 읽으신 후에 혹시 또다른 오해를 하실까 봐 말씀드린다. 제가 이 글을 쓴 것이 하나님을 옹호하려거나 변호하려는 것이라고 오해하시지 마시길 바란다. 하나님은 옹호받으시거나 변호를 받으실 필요가 있는 분이 아니시다. 그럼 왜 이 글을 쓴 것인가? 사람들이 하나님을 오해하므로 하나님의 큰 구원의 축복에 참여하는 것에서 멀어질 것이 안타까워 이 글을 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