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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무 Feb 04. 2021

죄와 벌

죄를 떠나보내는 방법

 의과대학을 마칠 때쯤, 청년 때의 일이다. 스터디 그룹이었던 친구 J 아쉽게도 인턴  프로그램에 들어가지 못하여, 함께 하였던 그룹의 친구들이 그를 위로차 이태원에 기분을 어주려고 하였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만취한 것은 그가 아니라 다른 친구 L이었다. 외국인들도 많이 오는 곳이었는데 어디선가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 쳐다보니 L이 주먹을 쳐들고 자신 몸의 두배나 돼 보이는 백인을 쫓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혼비백산한 우리는 여럿이 달려가 그를 데려오려 했으나 꿈쩍도 않고 웃고 있었는데 그의 얼굴을 보니 마귀의 모습이었다. 그것은 내가 알고 있던 친구 L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그런 표현을 하고 있었다. 그날 나는 마귀를 보았다. 친한 친구의 얼굴에서, 그것도 공자라 불리고 누구에게도 해코지한  적이 없는, 우리가 법이 없어도 살 사람이라고 한 그 친구의 얼굴에서. 그 이후로 그에게서 다시 그 모습을 본 적은 없다. 공자의 모습으로 돌아와  지금은 중후한 사회인으로 재직 중이다.


 또 다른 한 사례는 아주 가까운 분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인데, 모친께서 다급히 전화하셔서 부모님 댁에 황급히 갔더니 모친께서는 방에 문을 걸어 잠그고 숨어 계시고, 부친께서 취하셔 거실 소파에 앉아 계셨는데, 평소 본 적이 없는 광경으로  아주 상스러운 욕을 하고 계셨다는 것이다. 그분 역시 평소 고고하시고 인격적이시고 조용한 분이셨는데 말이다. 부친으로부터는 처음 보는 광경이라 몹시도 당황하셨다는 것이다.


 실재 일어났던, 다소 극단 적인 예를 들었지만 사실 크고 작은 일들에서 우린 우리의 죄악 된 면모를 지니고 있다. 최근에 성추행으로 나라가 수년간 조용할 날이 없는데, 어느 정당의 여성의원이 '피해자 다움'이나 '가해자 다움'이란 없다고 사회에 큰 명제를 던졌다.  이 말은 가해자가 어떤 특정될 수 있는 부류의 사람이  아니고 피해자도 그런 피해를 받을 만한 사람이니 그런 피해를 당했겠지 하고 알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고, 누구나 가해자가 될 수 있고 누구나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뜻으로 나는 이해하였다. 그러면서 그 여성의원은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덕망 있는 사람조차도 왜 이런 일에 실패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왜?


 이전의  글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인류 역사에 기록된  한 사건, 간음한 현장에서 잡힌 여인의 사건에서 돌을 들어 정죄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은 이미 증명된 바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들, 마음에 품은 것들을 동영상으로 찍는 장치가 개발될 경우, 정신이 올바르다면 다른 이들에게 보여줄 수 있을까?


 롬 7:20 만일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행한다면, 그것을 행하는 자는 더 이상 내가 아니라 내 안에 하는 죄입니다. 


 성경은 간단히 죄를 드러내어 준다. 우리가  죄 가운데 태어나 죄 가운데 살아와서 너무나 친숙하므로 죄가 나의 존재 자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성경의 빛으로 우리 존재를 스캐닝해 볼 때 죄는 한 인격으로 내 안에 거하는 어떤 존재라는 것을 볼 수 있다. 내가 술을 마시고, 내가 담배를 피우고, 내가 도박을 하고, 내가 누군가를 죽도록 미워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내가 아니라 죄라는 것이다. 이를 증명하기는 매우 쉽다. 죄를 짓지 않으려 해 보라. 여러분이 주체라면 죄를 억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이 어느 날부터 이제는 죄를 짓지 말아야 하지 하고 마음먹은 날부터 우주 가운데 가장 얼굴이 어두워진 사람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려야 할 수 없고,  그런 자신이 너무나도 고통스럽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친구를 실제로 본 적이 있다.


 인류가 죄악 된 존재냐 아니냐를 따지지 말자. 다른 어떤 사람을 지칭하며 그도 죄인이냐고 묻지도 말자. 내가 죄인인지 여부만 판단하면 답은 너무나도 간단하다. 나는 내가 죄인인 것을 시인한다. 나는 내가 생각한 것을 동영상으로 찍어 유튜브에 올릴 수 없다. 나는 아무도 없는 때에도  순결하고 고결하게 천사같이 존재할 수 없음을 시인할 수밖에 없다. 나의 동료가 나보다 더 좋은 평가를 받고 인정받을 때, 내 안에 어떤 동요도 없이 순수하게 그를 존경하고 감상할 수 없다. 나는 나를 사랑해준 사람들조차도 때로 미워하고 거칠게 대한 적이 있다. 나의 말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상처 받고 마음이 상한 적이 없다고 단언할 자신이 도저히 없다. 나는 죄인이다.


 죄를 결과로 벌을 받게 된다. 자명한 원칙인데, 성경에서 죄의 대가, 즉 죄에 대한 판결은 '사망'이다. 죽음이 온 것은 인류의 범죄 이후의 일인 것이다. 이 죽음은 육신의 심장 박동이 멈춘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망은 어떤 느낌을 준다. 어둠과 함께 사망은 우리가 숨 쉬고 생활하는 영역에도 찾아오기도 한다. 특히 죄와 강하게 연관될수록 사망의 느낌은 더할 수 있다. 죄는 사망이라는 종착역으로 우릴 몰아간다. 죄는 씨를 뿌리고 다니고 사망은 추수하러 다닌다. 어떻게 이 죄에서부터 놓일 수 있는가? 죄로부터 해방되는 길은 없는가?


  왕이 군대가 많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며

용사가 힘이 세다고 구출받는 것이 아니라네

군마는 구원받는데 헛된 것이며

그 큰 힘으로도 구출해내지 못한다네

(시편 33:16-17)


 강한 힘의 능력이 있다면 구원받을 수 있을까? 시편 33편을 쓴 사람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강한 힘을 지닌 말의 힘 같은 것으로도 죄를 제할 수 없다. 한 마리 말의 힘이 부족한 것일까? 승용차 중  벤틀리는 500마력을 넘는 최고 출력을 자랑한다. 이 차를 타고 달리면 나를 괴롭히는 죄가 떨어져 나갈까? 500마리 넘는 말이 끄는 힘인데 말이다. 요새 명상이 유행인데 명상을 하면 죄가 사라질까? 직장에 복귀해 한 시간도 지나기 전 성질이 폭발할지도 모른다. 맨 손으로 암벽을 타면, 혹 만유인력의 법칙으로 죄가 땅 밑으로 떨어질까? 고행을 하면 죄가 떠나갈까?  이미 해본 사람이 있다. 마르틴 루터이다. 그는 수도사로 하나님을 섬기려 자신을 헌신하였으나 여전히 죄로부터 해방받지 못했다. 당시 계단을 무릎으로 기도하며 오르면 구원에 이른다는 가르침을 따라 고행도 행하였으나 자신이 여전히 의롭지 않다고 느낄 뿐이었다.


 친구여, 어떻게 하면 이 죄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겠는가?


 만약 우리가 함께 하는, 어떤 골치 아프고 꾸준히 괴롭히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가 내 옆에서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데, 나로서는 그를 어찌할 도리가 없다. 그런데 어느 날 어떤 기차역에서 먼 곳으로 떠나는 기차 편에 그를 보내게 되었다고 하자. 그가 간 후 돌아올 길이 없다는 것을 알 때, 그 기차역에서 나는 그를 보내면서 "잘 가게, 그리고 다시 오진 말게"라고 하지 않겠는가?


 여기에 죄를 떠나보낼 수 있는 기차역이 있다. 그 역의 이름은  십자가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죄를 없애신 십자가가 죄를 떠나보낼 수 있는 일종의 기차역이다.

  

 곧 하나님은 죄와 관련하여 그분 자신의 아들을 죄의 육체의 모양으로 보내시어, 그 육체 안에서 죄에 대해 유죄판결 하심으로써(로마서 8:3下)


 베드로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은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위에 침례를 받아 여러분의 죄들이 용서받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사도행전 2:38)


 그러나 이제는 여러분이 죄에게서 해방되어 하나님께 노예가 되었고 거룩하게 됨에 이르는 열매를 맺고 있는데, 그 결말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로마서 6:22)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더 이상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십니다. 이제 내가 육체 안에서 사는 생명은 나를 사랑하시어 나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 안에서 사는 생명입니다.(갈라디아서 2:20)


 이 네 구절을 통해 볼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써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셨고, 그 십자가의 죽음으로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의로우신 요구를 다 해결하셨고, 그분의 십자가의 죽음에 내가 연합하여 나도 못 박혔으므로 죄의 문제가 해결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내게 적용되려면 그분,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받아들여야 한다. 전에 언급한 것과 같이 만찬을 예비하였으나 그것을 먹지 않는 다면 상위의 산해 진미는 나와 아무 상관없는 것 같이 구주 예수께서 이 글을 읽고 계신 바로 여러분을 위해 죽으셨으나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는 다면 그분의 역사는 여러분에게 적용될 수 없는 것이다.


 이제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멀리 떠나보낼 수 있게 되었다. 그 죄는 나를 떠난 나를 괴롭혔던 어떤 사람이 기차를 타고 멀리 가버림으로 더 이상 내게 어떤 영향을 줄 수 없는 것 같이, 내가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십자가의 죽음에 머무는 한, 그 죄는 내게 어떤 영향도 줄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역에서 머물며 이렇게 말해보자. "죄여, 잘 가게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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