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 첫날, 아내와 아침 일찍 걷기 위해 집을 나섰다. 오늘 경로는 양평 물의 정원에서 시작하여 마음의 정원을 거쳐 구봉마을회관 근처 우리밀 장칼국수집에서 점심을 하고, 다시 그 길을 따라 돌아오는 것으로 강변 도보를 따라 걷는 길이다.
코로나 19 시대에 우리가 즐겨 걷는 언택트 코스 중 하나이다. 오늘도 걷는 내내 사람들과 거의 마주치지 않고 쾌적하게 걷고 왔다. 예보는 영하 1~2도에서 시작하여 영상 10도까지 오른다고 하여 비교적 가벼운 차림으로 나왔는데, 강변이라 습도가 있어 그런지 걷다 보니 추위가 차 안에서 유지해 왔던 온기를 점차 빼앗아가고, 그것도 모자라 손목 안으로 침입하려 호시탐탐 기회를 노려, 옷소매를 포함해 주머니 속으로 손을 넣었다. 음습한 추위라고나 할까.
얼어붙은 북한강변을 따라 걷는다.
두물머리로 유입되는 북한강 변을 따라 걷는데, 강은 저 멀리 보이는 곳만 은빛으로 반짝이는 물의 흐름만 보여 줄 뿐 온통 꽁꽁 얼어붙었다. 혹시나 하고 가져갔던 목도리를 두르고 아내도 오리털 판초를 걸치며 저공으로 침습하는 차가운 공기와 다투며 걷는데, 옅게 낀 안개로 강 건너 산기슭은 아련하게 보이고, 붉은 머리 오목눈이들이 무리를 지어 재재재 거리면 갈대밭을 무리 지어 휘젓고 다녔다. 뱁새라고도 불리는 이 오목눈이들을 자세히 보면 그 얼굴이 포메라니안 같이 생겨 귀엽기 짝이 없다. 여러 번 사진을 찍으려 시도했지만 부산을 떨고 얼마나 빠른지 초점을 맞추려 하면 벌써 다른 곳으로 가버리는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오늘은 웬일인지 몇 마리가 황송하게도 사진을 찍도록 모델을 서주었다.
얼굴이 포메라니안같이 귀여운 붉은 머리 오목눈이
조그만 눈에 포근해 보이는 털들과 짧고 깜찍한 짙은 색의 날개를 지니고 가녀린 두 발로 갈대숲 사이를 무리 지어 날아다니는 이 오목눈이들을 열심히 찍다 보니 갈길에 발목이 잡혀있었다. 다시 발길을 재촉하여, 지난봄과 여름에 꽃 양귀비들로 화려했었던 강변길을 기억으로만 떠올리고 지금은 황량해진 길을 높이 자란 갈대를 벗하여 걸었다.
적당히 걷다가 아내와 햇빛이 내리쬐는 의자 옆에 서서, 가져간 커피와 케이크 한 조각을 먹으며, 밖의 추운 기운과 따뜻하게 몸 안으로 들어가는 커피의 오묘한 조화를 행복하게 즐기고 다시 길을 걸었다.
마음의 정원을 지나 자전거길과 합류되는 지점을 따라 한참을 걷다 보니 드디어 구봉마을 장칼국수집이 보이고 언 몸을 녹일 겸 점심도 해결할 겸 식당으로 늘어서니 이른 점심이라 그런지 우리 부부가 첫 손님인듯했다. 새로 생긴 메뉴인 만둣국과 찐만두를 시키고 뜨거운 국물로 몸일 녹이니 돌아갈 길도 자신이 생기기 시작했다. 훈훈해진 몸으로 다시 강변을 따라 돌아오는데 이미 해의 고도가 자릴 잡고 안개도 거의 걷히니 기온도 올라 안팎으로 따뜻해졌다.
기온이 다소 오르니 오전에 보이지 않았던 새들도 여기저기 보이고 얼음과 물 사이 경계에서 무리지은 온갖 물새들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쳐다보는 모습이 낯설었던지 물을 박차고 날아오르는 비오리들
한참을 가는데 오는 길에 닫혀있었던 딸기농장의 문이 열려 있었다. '빨강 딸기'농장이다. 파란 딸기도 있냐며 농장 안으로 들어가니 농장 안주인께서 반갑게 맞아 주신다. 비닐하우스 안으로 들어가는데 벌 한 마리가 날아와 우리 주위를 지나쳐 "어, 벌이 있네요?"라고 하니 "일하다 잠시 나가네요."라고 답하셨다. 재미있게 말씀하시는가 보다 하고 귀담아듣지 않았는데, 겨울 하우스 딸기를 사며 이것저것 이야기하다 보니 흥미로운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 벌이 정말 일꾼이었던 것이다.
일을 수월하게 하려 재배 상자들을 높게 위치시켰고, 왼쪽 검게 보이는 상자는 뒤영벌이 사는 거처이다.
지난해에 봄과 초여름까지 이 길을 걸으며 여러 차례 들려 딸기를 사 먹었던 농장이었는데, 현장에서 딴 딸기이다 보니 신선하고 맛이 있고, 마트에서 사 온 것과 달리 쉽게 무르지 않아 좋은 인상을 갖고 있던 터에 반가운 마음으로 다시 들린 것이었다. 날씨가 따듯해지면 하우스 비닐을 걷어 놓으니 밖에서 야생벌들이 들어와 문제가 없는데, 겨울철에는 야생벌들이 없어 특별히 벌들을 렌트하여 꽃들을 수정시킨다는 것이었다. 이 벌들은 외국에서 수입해 오는데 수명이 아주 길지는 않아 간간히 갈아준다고 하셨다.
하우스 안에 핀 딸기 꽃들과 익어가는 딸기들
영어로는 bumble bee라고 서식 상자에 쓰여있었는데 사전으로 보니 뒤영벌이라고 번역되어 있었다. 이 뒤영벌들이 낮에 따뜻해지면 서식 상자에서 나와 딸기 꽃에 돌아다니며 수정을 돕고 저녁이 되거나 추우면 서식 상자에 들어가 쉰다고 한다. 상자 안에 벌집을 짓고 꿀들을 저장하진 않고 단지 꽃 수정을 시키는 일만 하는 일벌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간간히 안에 화분을 먹이로 넣어주신단다. 일꾼들에게 새참을 주듯 말이다. 이 벌들이 없으면 겨울철 하우스 딸기 재배는 불가능해 보인다. 저 많은 딸기 꽃들을 사람이 세심하게 일일이 인공수정을 해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안주인께서 말을 이어가신다. 때로 일하기 꾀 가나서 쉬고 싶을 때, 벌들이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일하는 모습을 보면 자신도 격려를 받고 다시 일하게 된다는 것이다. 듣다 보니 너무 신기해 다시 하우스 딸기 밭으로 들어가니 벌 한 마리가 마치 입국심사장에서 검색을 하듯 내 주위를 맴돈다. 이 벌들이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집도 지킨다는 생각이 문뜩 들었다.
서식 상자에는 벌들이 출입하는 출입구가 있었다. 상자 안에 쉬던 벌들이 일하러 나오는 곳이었다. 내가 보는 동안에도 한두 마리의 벌들이 빠져나왔다. 벌들을 찍으려 하는데 빠르기도 하고 초점 맞추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여러 장을 찍었으나 결국 실패하였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처음 "일하다 잠시 나가네요."라고 하신 안주인의 말이 그냥 한 말씀이 아니었다. 이 농장은 아이들이 현장 체험하러 오는 곳이기도 한데, 아이들이 벌을 보고 "이 벌들이 쏘지 않아요?"라고 묻곤 하는데 "벌들이 일하느라 바빠서 너희들에겐 관심도 없어"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 벌들은 영락없는 딸기 농장 주인과 함께 하는 일꾼들임에 틀림이 없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뒤영벌들이 다시 보였다. 작은 일꾼들, 사람과 동역하는 작은 사람들같이 보였다. 걸리버 여행기에 나오는 작은 사람들처럼 말이다. 딸기 한 상자 사들고 돌아오는 길은 마냥 즐거웠다. 곤충과 사람의 따뜻한 협업의 광경을 보고 오는 마음엔 왠지 뿌듯함이 가득해졌다. 이 '빨강 딸기농장'에는 아름다운 생명의 노래가 흘러나오는 듯했다.
돌아오는 길에 강이 유입된 작은 호수가 얼었다. 그 위에 물닭과 청둥오리가 뒤뚱 거리며 노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