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과대학 시절 내내 공부의 양은 고3 때를 훌쩍 뛰어넘었다. 시험 기간 중에는 수주 간 밤을 거의 새우다 시피하며 공부할 수밖에 없었는데, 인간의 극한에 도달할 때까지 공부해야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 수밖에 없었다. 한 번은 시험공부하던 중, 새벽에 들어서야 한두 시간 눈을 붙일 수밖에 없는상황이었는데, 잠결에 헬리콥터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 눈을 떠보니 같이 공부하던 친구들은 다들 시험 보러 갔고 나만 홀로 남아 있었다. 시간을 보니 시험장까지 매우 촉박한 상황. 황급히 챙겨 뛰어가는데 구름 위를 날아가는 것 같은 비현실적인 느낌이 들었다. 그날 시험은 악명 높은 생화학 시험이었다. 눈은 시험지를 보고 손으로는 답을 쓰고 있었는데 머릿속엔 아무 생각도 없는 듯한 이상야릇한 시간이 흐르고 매정한 시험시간 종료의 벨은 울렸다. 다행히도 재시험 명단에는 내 이름은 빠져 있어 안도의 숨을 쉬었지만 이런 아찔한 순간들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신경해부학, 병리학, 약리학, 내과학, 신경외과학, 정형외과학, 산부인과학, 특히 선천성 대사이상을포함한 소아과학, 숱한 과목들이 다 필수 과목이고 어느 한 과목이라도 낙제 점수이면 재시험을 치러야 하고 그러면 방학은 사라지게 되니 필사적으로 공부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공부하였지만 전과목을 전 학년 모두 A++받고 졸업할 수 있는 학생은 없었다.
인간의 한계로는 최선을 다해도 부족하기 마련이다. 거기에 각종 제한 즉 체력, 시간, 컨디션, 주변 상황, 인관 관계, 설비와 여건까지 합하면 불확실성은 더 커진다. 완전할 수 없는 불확실성 말이다. 그렇게 사람들은 사회를 이루고 일상을 살아간다. 여기저기 허점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인재(人災)가 일어날 요소도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내가 전 학년 전과목 A++를 받지 못한 사람일 뿐 아니라 내가 만나는 내 주변의 거의 모든 사람들 중 전과목 A++를 받은 사람들은 없다. 하지만 우린 내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상대가 완전하길 바란다. 거기에 완벽하기 까지. 대부분 그렇지 못하니 실망하고 원망하고 따지게 되고 상처를 받기 십상이다. 그래서 사람보다 개가 더 편하다는 사람들도 있다. 사람보다 똑똑하진 못해도 충성이라도 다하니까 말이다.
시어머니가 며느리가 미워지면 99가지 싫은 이유를 발견해 낼 수 있다.돌이켜 생각해보자. 서로 너무 따진 것 아닐까? 남들에게 전과목 A++맞을 것을 요구한 것은 아닐까? 자신도 일생 한 번도 해보지 못한 것 아니었는가? 왜 다른 이들에겐 그렇게 완벽을 요구하며 용서하지 못할 것 같이 정죄하고 미워하는가? 내가 부족한 것만큼 다른 이들의 허물을 덮어주고 품어줄 수는 없을까? 그 모든 요구들은 돌고 돌아 결국 자기에게 돌아 올터인데 말이다.
마태복음 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여러분을 위하여 해 주기를 남들에게 바라는 대로, 여러분도 그들에게 그렇게 해 주십시오. 이것이 율법이며 신언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