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와 유연성 그리고 기록하는 교사
졸업이 얼마 남지 않은 겨울날. 리코더 외부 강사 수업이 있어 음악실에 갔다. 전학 온 친구까지 21명 전원 리코더와 음악책을 준비해서 바르게 앉아 강사의 지시를 따르며 리코더를 연주했다. 내가 아이들과 처음 만났던 9월 2일 2교시에 국악 강사와 했던 수업이 오버랩되면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우리 아이들도 이렇게 잘 배우고 칭찬받을 수 있는 아이들인데 온 학교의 문제 학급으로 취급받아 눈총과 야단을 맞으며 점점 반항적인 행동을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과연 이 아이들이 개선이 가능한 걸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리고 실행 연구자로서 나의 실행 덕분에 아이들이 변화했다는 뻔한 결론의 신파조에 가까운 보고서를 쓰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러나 아이들은 변했고, 더불어 나도 변했다. 정확히 우린 함께 성장했다. 그 변화를 설명하는 키워드를 뽑는다면 그것은 ‘관계’다.
아이들을 가르치고 통제하고 변화시켜야 하는 교사가 아니라, ‘이 아이들을 어찌할꼬’ 하는 애통한 마음을 가진 어른으로 다가가서 아이들의 인생에 조그마한 도움이라도 줄 수 있는 진짜 ‘어른’이 되고 싶은 마음이 우러났을 때 우리들의 관계는 달라졌다. ‘관계’가 달라지니 내가 교사로서 인식하는 ‘역할’ 기대가 달라졌고, 매우 유연한 자세가 필요해졌다. 난 원래 좀 엄격하고 원리원칙을 중시하는 교사였는데, 내 원리원칙을 지키는 것이 이 상황에 필요한 일인가 성찰하며 유연하게 대처했다. 학급살이를 ‘기록’하고 저녁이면 기록한 자료를 읽으며 성찰하는 시간을 통해 더욱 유연성을 길렀다.
한 학기를 지내고 보니, 아쉬운 마음이 크다.
아이들 한 명 한 명의 사정을 알아보기 위해 생활기록부를 모두 검토하고 학급 교육과정을 샅샅이 뒤졌지만 만족할 만한 정보를 찾을 수 없었다. 옆반 선생님에게 묻고, 전년도 담임선생님들을 찾아가 계속 물었다. 여러 명의 선생님들과 대화를 했는데, 다른 학교로 전근 가신 경우는 연락드리기가 어려웠다. 내가 관찰한 내용과 선생님들에게서 얻은 정보를 종합해 아이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어느 순간, 이런 자료들이 DB화 되어 있으면 새로 담임 맡은 사람이 이런 노력은 안 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K와 같이 특수한 상황의 학생은 1학년부터 그에 대한 정보와 특기사항이 누적되어 있었다면 매년 새로운 담임마다 아이를 알아가는데 들여야 하는 노력과 시간이 줄어들 수 있지 않을까? 아이가 문제에 부딪혔을 때 관련자들이 모여 문제 해결을 위한 솔루션 회의를 열 수는 없었을까? 마치 종합병원에서 주치의 주관으로 여러 과의 협진이 필요할 때 하는 솔루션회의 같은 것을 학교에서는 할 수 없는 걸까? 이 고민에 대한 해답을 수호믈린스키의 책에서 찾았다.
교사들 간의 협력을 촉진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 중 하나는 매달 두 번 월요일 오후에 열리는 세미나였다. 이 세미나는 두 파트로 나누어서 진행되었다. 첫 번째 파트는 교사의 발표, 그리고 특정 학생 집단과의 경험 평가로 구성되어 있다. 발표 교사는 자신의 학급 운영에 관한 전반적인 설명을 마친 뒤에 주목할 만한 한두 명의 학생들을 소개했다. 이 아이들의 성격과 행동에 대한 상세한 소개가 끝나면, 다른 교사들은 자신들의 관찰과 경험에 근거한 의견을 추가적으로 내놓았다. 그리고 다 같이 이 아이들의 요구를 충족시킬 방법들을 찾았다. (아이들은 한 명 한 명 빛나야 한다, P227)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사랑을 받지 못하는 아이,
이 세상을 향해 증오심만 키워가는 아이.
성자가 아닌 이상 이 모든 아이들을 가슴에 품기 힘든 것이 우리의 한계입니다. 우리는 이런 아이에게 조금도 영향을 미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먼 훗날 아이는 기억할 겁니다. 그래도 한때 자신의 마음속에 들어와 자신을 이해하려 애썼던 그 한 사람을 떠올리며 삶과 인간에 대한 생각을 바꾸는 전기로 삼을지도 모릅니다. (이성우, 교사가 교사에게)